하루 동안 펼쳐지는 소음의 플레이리스트
이 글에 등장하는 노래들.
- No Roots - Alice Merton
- Want You Back - HAIM
- Wish You Were Here - Pink Floyd
- Piano Sonata No. 3 in B flat major, K. 281 (K.189f) - Vladimir Horowitz
- Unsquare Dance - Dave Brubeck
- Brighton Rock - Queen
- One Headlight - Wallflowers
- Crazy - Gnarls Barkley
- Speed King - Deep Purple
- I Can’t Drive 55 - Sammy Hagar
- Fast Car - Tracy Chapman
- Nobody Else Will Be There - The National
- Perfect Places - Lorde
이 글에 등장하는 소리들.
자동차 소리, 사이렌 소리, 클랙션 소리, 빗방울 튀기는 소리, 버스 지나가는 소리, 오토바이 소리, 새들의 소리, 공사장 드릴 소리, 복도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 옆집의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복도에서 청소하는 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작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지르는 소리.
1.
잠에서 깨자마자 어젯밤에 들었던 음악을 생각한다. 멜로디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보컬의 목소리와 묘한 리듬만 떠오른다. 베이스기타 소리 역시 강렬했다. 기억해보려고 머릿속의 플레이리스트를 헤집는다. 그룹이 아니라 솔로의 음악이었지. 최근에 나온 앨범인 것은 확실하다. 아이튠스를 뒤지면 곧바로 아티스트의 이름을 알 수 있겠지만 아직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게 좋다. 안개 속에 숨어 있는 음악을 조금 더 듣도록 하자.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면 다시 졸음이 몰려온다. 음악이 꿈으로 쫓아온다.
2.
창문을 열어놓고 잠드는 경우가 많다.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지나치게 조용하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암막 커튼으로 모든 빛을 차단하되 창문은 열어둔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 어둠을 깨우는 사이렌 소리, 신경질적인 클랙션 소리 사이에서 잠이 들고, 깨어나면 소리로 날씨를 판별한다. 커튼을 열지 않는다. 맑은 날엔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소리 역시 건조하다. 자동차 바퀴가 물을 튀기는 소리로 비가 오고 있단 걸 알아차린다. 암막 커튼 너머로, 창문 너머로 비가 오고 있는 풍경을 상상한다.
일상적인 소리에도 높낮이가 있다. 버스 지나가는 소리가 도라면, 오토바이는 솔쯤 될 것이다. 새들이 가끔 지저귀는 소리는 높은 미, 먼 곳의 공사장에서 들리는 드릴 소리는 시, 복도에서 누군가 크게 웃는 소리는 라,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음악이 된다. 소음의 음악을 감상한 다음, 어젯밤에 들었던 음악을 생각해낸다. 앨리스 머튼(Alice Merton)의 ‘No Roots’였다. 앨리스 머튼의 노래를 다시 들어볼까 하다가 아침에 어울리는 음악을 선택했다. 하임(HAIM)의 ‘Want You Back’. 커피가 끓듯 서서히 아침의 온도를 끌어올리는 음악이다.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3.
시차(jet lag)보다 공간차(place lag)가 내게는 더 설득력이 있는 단어다. 시차가 표준시간대의 선을 급하게 넘은 결과라면, 공간차는 우리 내면의 공간 감각이 비행기를 따라잡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비행의 발견>에서 마크 밴호네커는 공간차를 이렇게 설명한다.
“공간차가 발생하려면 꼭 표준시간대를 지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비행기가 꼭 필요하지도 않다. 가끔 숲에 하이킹이나 피크닉을 하러 갔다가 당일 늦게 도시로 돌아올 때 나는 자동차와 소음, 콘크리트와 유리의 장애물에 둘러싸여 되묻는다. 오늘 아침 숲에서 걸을 때 느낌이 어땠지? 그럴 땐 다른 곳에 있었던 게 불과 오늘 아침이었는데 벌써 1주일쯤 된 것 같다.”
공간차는 여행을 갈 때마다 느끼는 감각이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고 유럽에 도착했을 때, 호텔에서 푹 자고 일어나 유럽의 오래된 거리를 걸을 때, 문득 어지럽다. 24시간 전에 한국에 있던 나와 리스본의 에그타르트 가게에 앉아 있는 내가 동일한 인물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공간이 곡선으로 휘고, 모든 장소가 가상의 공간같이 느껴진다. 나는 분명 10시간 동안의 비행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지만, 그걸 누가 증명해줄 수 있을까.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의 공간으로 잘못 미끄러져 들어온 것 같다.
공간차를 해결해줄 수 있는 묘약이 바로 음악이다. 음악은 공간에 머물지 않으므로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Wish You Were Here’를 들을 때마다 하늘에 떠 있던 음악이 땅으로 떨어지는 영상을 떠올린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은 나를 낚아챈 다음 다시 솟구쳐오른다.
4.
얼마 전에 보스(Bose)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QC35 제품을 샀다. 블루투스로 작동하는 기계라 집안이나 가까운 동네의 산책길에서 음악 감상을 할 때 제격이다. 처음에는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는 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노이즈 캔슬링의 원리가 재미있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에는 마이크가 달려 있어서 주변의 소음을 받아들인 다음 역소음을 발생시킨다. 소음과 소음이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상쇄간섭이 일어나 우리의 귀에는 소음이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노이즈 캔슬링의 원리를 들으면서 주성치의 영화를 떠올렸다. <쿵푸 허슬>에는 음악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자객이 등장하는데, 현을 연주할 때마다 모든 음은 칼날이 되고, 창이 된다.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들 앞에 ‘사자후’가 등장한다. 사자후는 한번의 사자후로 자객의 연주를 무력화시킨다. 고요한 순간, 정적이 찾아드는 순간, 노이즈가 캔슬링되는 순간이었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덕분에 음악을 듣는 시간이 더욱 즐거워졌다. 헤드폰을 쓰면 전에 알던 음악도 다르게 들렸다. 오직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방 안에 소리와 나만 마주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으면 방안에 그와 나 단 둘이 있는 것 같았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 리스트의 곡을 집에서 연주한 <Horowitz At Home> 앨범을 자주 듣는 이유 역시, 그의 집에서 듣는 음악 같기 때문일 것이다.
5.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소리를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천둥소리인 줄 알았는데 옆집의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일 때도 있고, 바람 소리인 줄 알았는데 복도에서 하는 청소 소리였던 적도 있다.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그 이미지는 대체로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울음소리인 줄 알았는데 웃음소리였던 적도 있고, 화 내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반가움을 표시하는 소리였던 적도 있다. 소리에 집중하다보면 환청이 들릴 때도 있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그 소리에 집중하다보면, 소리가 음악이 되기도 한다. 물방울 소리가 그쳤는데도 내 귓속에서는 물방울 소리가 계속 들릴 때도 많다. 올리버 색스는 <뮤지코필리아>에서 환청에 대한 경험을 이렇게 적었다.
“당시 나는 스물네 살이었고 범선을 배달하기 위해 고용된 선원이었습니다. 우리는 22일 동안 꼬박 바다에 있었어요. 무척 지루했죠. 처음 사흘이 지나자 가져간 책을 다 읽었습니다. 구름을 보거나 낮잠을 자는 것 말고는 오락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었어요. 며칠 동안 바람도 불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돛을 바람 부는 쪽으로 돌려놓고 엔진을 가동시켜 천천히 배를 움직였습니다. 나는 갑판이나 선실 벤치에 눕거나 유리로 된 창문 밖을 멍하니 내다보곤 했습니다. 음악 환청을 경험한 것은 이렇게 무기력한 나날이 이어지던 무렵이었습니다. 선박 자체에서 나는 단조로운 소리에서 환청이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냉장고가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바람이 선체 장비에 부딪혀 내는 소리였죠. 이것이 악기 소리로 변형되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울려댔어요. 원래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그저 노곤한 상태로 누워 귀를 황홀하게 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언제까지고 듣고 있었습니다. 백일몽처럼 소리를 즐기고 나서야 그 소음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볼 마음이 생기더군요. 악기 소리는 평소에 즐겨 듣던 것이 아니어서 무척 흥미로웠어요. 냉장고가 윙윙대는 소음은 마치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의 기교넘치는 독주처럼 고음역의 현이 재빨리 울려대며 앰프에서 분출하는 듯했습니다. 장비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는 웅얼거리는 저음과 명료한 선율을 갖춘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 연주 같았습니다. 두 소리 모두 친숙했지만 집에 있는 오디오로는 아마 이런 음악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
6.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에는 무려 서른다섯 곡의 음악이 쓰였는데, 음악을 어찌나 적재적소에 잘 썼는지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것 같다. 수많은 음악 중에서도 내 귀를 사로잡은 것은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의 ‘Unsquare Dance’였다. 주인공 베이비는 어린 시절의 사고 때문에 이명 증세가 생겼고, 매일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음악을 들으면 ‘삐—’ 하는 소리가 사라진다. 또 다른 종류의 노이즈 캔슬링인 셈이다. 베이비는 모든 순간에 음악을 듣는다. 운전을 할 때도, 누군가 중요한 설명을 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음악을 듣는다. 은행을 털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때, 베이비는 이어폰으로 데이브 브루벡의 ‘Unsquare Dance’를 듣는다. 감독 에드가 라이트는 은행 강도들의 계획을 들려주는 대신 베이비가 듣는 음악을 크게 들려준다. 베이비는 데이브 브루벡이 되어 피아노를 치고, 박자를 탄다. 베이비에게 음악은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이며,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막아주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며, 친구이며, 동료며, 선생님이다.
베이비는 등장인물인 버디와 함께 퀸(Queen)의 ‘Brighton Rock’을 듣는다. 두 사람은 자신만의 ‘드라이빙 BGM’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한다.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없는 드라이버는 제대로 된 드라이버가 아니라고. 달리는 순간 속도를 잊게 해줄 음악, 엔진처럼 자신의 심장을 두드려줄 수 있는 음악, 액셀러레이터를 계속 밟게 해주는 음악을 모아서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어린 시절, 내가 음악에 빠져들었던 이유 역시 비슷했던 것 같다. 이명 증세는 없었지만 벽이 필요했다. 내 방은 없었지만, 음악을 듣는 순간 벽이 생겼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고, 그토록 달콤한 고립을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다. 내 차가 생겼던 날 역시 비슷한 기분이었다. 창문을 꽉 닫고 음악을 크게 틀면 차가 통째로 비트를 타는 것 같았다. 한때는 차에서 들을 음악을 준비하기 위해 하루를 통째로 허비한 적도 많았다. 월플라워즈(Wallflowers)의 ‘One Headlight’, 날스 바클리의(Gnarls Barkley)의 ‘Crazy’, 딥 퍼플(Deep Purple)의 ’Speed King’, 새미 해거(Sammy Hagar)의 ‘I Can’t Drive 55’,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의 ‘Fast Car’…. 음악이 있으면 세계 끝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7.
음악 듣기는 산책과 닮은 구석이 많다. 전혀 알지 못하던 길을 탐험하듯 새로운 음악을 듣고, 익숙한 길을 편안하게 거닐 듯 잘 아는 음악을 여러 번 듣는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대로, 익숙한 것은 익숙한 대로 내 마음을 움직인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산책을 나선다. 가장 좋아하는 산책 코스는 금요일 밤의 유흥가.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술집 사이를, 이어폰을 끼고 걸어다닌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그들이 내는 소리도 궁금하지 않다. The National의 신곡 ‘Nobody Else Will Be There’를 들으면서 골목을 걸어다니다보면, 사람들의 움직임이 자세히 보인다. 크게 웃는 사람, 취해서 골목에 기대 서 있는 사람,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 편의 뮤직 비디오처럼 움직인다. 음악을 들으면서 산책을 하면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괴리, 들리지 않는 소리와 숨겨진 장면들의 비밀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 이렇게 적었다.
“생각에 잠겨서 배회하는 것, 즉 빈둥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은 철학자의 입장에선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이다. 특히 가짜 시골의 경우에 그러한데, 이런 곳은 추하고도 기묘하고, 두 가지 특징을 모두 띠며, 특히 파리와 같은 대도시를 둘러싸고 있다.”
소리가 제거되면 사람들의 모습들은 기묘해진다. 기묘한 사람들을 보는 재미,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르게 생각하는 재미, 들리지 않는 소리를 애써 상상하는 재미야말로 헤드폰 쓰고 하는 산책의 진짜 재미일 것이다. “사람을 피하는 방법이 사람을 찾는 방법과 닮은 경우가 있다.”는 문장 역시 빅토르 위고가 쓴 것이다. 아마도 빅토르 위고가 요즘에 태어났다면 분명히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샀을 것이다.
8.
잠들기 전에 Lorde의 ‘Perfect Places’를 듣는다. ‘매일밤, 나는 살고, 또 죽기도 하지.” 노래는 그렇게 시작한다. “완벽한 장소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 그런데 대체 엿 같은 완벽한 장소란 게 대체 뭐야?” 노래는 그렇게 끝난다. 내게 있어 완벽한 장소란 무엇일까? 그리고 어디일까? 내게 완벽한 장소란 소음과 함께 있는 곳이 아닐까. 때로는 소음을 찾아서 듣고, 때로는 소음을 막기 위해 소음을 만들어낸다. 창문을 열어두고 자리에 눕는다. 소리를 자세히 듣는다. 소음이라 말할 수 없는, 삶의 찌꺼기와 같은 소리들이, 차분히 바닥에 내려앉는다. 높은음자리에 있던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낮은음자리로 내려앉는 것 같다. 새들도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나는 이 소리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누군가 어둠 속에서 소리를 지른다. 내용이 잘 들리지 않는다. 울고 있는 것인지, 웃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보려다 나는 잠이 든다.
- 평점
- 7.5 (2017.09.14 개봉)
- 감독
- 에드가 라이트
- 출연
- 안셀 엘고트, 케빈 스페이시, 릴리 제임스, 에이사 곤잘레스, 존 햄, 제이미 폭스, 플리, 스카이 페레이라, 제프 체이스, 존 번달
- 아티스트
- Alice Merton
- 앨범
- No Roots EP
- 발매일
- 1970.01.01
- 저자
- 올리버 색스
- 출판
- 알마
- 출판일
- 2016.08.17
- 아티스트
- Lorde
- 앨범
- Melodrama
- 발매일
- 1970.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