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샐린저의 단편 <웃는 남자> 속 추장
(오래전에 쓴 글인데, 어디에 쓴 글인지는 기억이.......)
책을 체계적으로 모아두는 편이 아니다. 내 방에는 늘 정리 안된 책들이 전쟁터의 시체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김중혁 병장님, 저는 글렀어요. 포기하세요. 저를 버리고 가세요.”라는 책들의 절규가 들리는 것만 같다. (“제군들, 그러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네”) 어떻게든 정리를 해보고 싶지만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소설을 읽은 몇몇은 내가 대단한 수집가일 것이며 정리도 엄청나게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 그래,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 ‘저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잡지사 기자 여러분! 제 방에는 대단한 컬렉션도 없고, 희귀한 수집품도 없을 뿐더러 기자님들이 발 디딜 공간조차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히는 바입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니까요.
책장에서 유일하게 정리가 돼 있는 부분이 있다. 동료 작가들이 보내준 국내 소설을 모아둔 책장이 하나 있고, 그 옆에는 외국 작가들의 소설을 모아 둔 책장이 붙어 있다. 두 개의 책장에 소설만 가득한 셈이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두 개의 책장 앞을 어슬렁거린다. 아무 책이나 꺼내서 넘겨보곤 한다. 읽은 책도 있고 읽지 않은 책도 있다. 수백 권의 책 안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책들을 책이라 생각하지 않고 집이나 마을이나 도시라고 생각하는 순간, 경건해진다. 집과 도시와 그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만들어낸 소설가들의 시간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도대체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시간이 압축돼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 어질어질해지기도 한다.
소설책을 뒤적이다가 페이지 속에서 잊고 있던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오래 전에 읽은 작품 속 인물인데, 여전히 생생하다. 가끔은 실제 인물보다 소설 속 인물이 또렷할 때가 있다. 그 사람은 거기에서만 살고, 변하지 않으며, 갑자기 사기를 당해서 집안이 홀라당 망하는 일도 없으며,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성격이 바뀌는 법도 없으며, 늙지도 않는다. 계속 거기에서 살았고, 앞으로도 거기에서 살 것이다. 거기에서 태어나고, 거기에서 여전히 죽을 것이다.
어떤 소설은, 읽다보면 그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무탈하고 완벽해 보이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들과 사귀면서 뛰어놀고 싶다. 그런가 하면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은 세계도 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아찔한 곳, 나에게 이런 일들이 닥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세계가 있다. 장난처럼 요약해보면, 모든 소설은 두 종류다. 사귀고 싶은 사람들의 세계이거나 지켜보고 싶은 사람들의 세계이거나.
예를 들어 피터 메일의 <내 안의 프로방스>의 세계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쉬고 싶은 곳이다. 주인공 사이몬과 사귄 다음 프로방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마음껏 쉬고 싶다. 와인이나 마시면서 자연과 함께 흥청망청 놀고 싶다. 반면에 허먼 멜빌이 만든 <필경사 바틀비>의 세계는 지켜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바틀비는 소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베스트 5 안에 들겠지만 절대 사귀고 싶지는 않다. 사귀었다가는 아마 속 터져 죽겠지. 책장의 모든 소설을 두 개의 세계로 나눈 다음 분류하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겠다, 고 마음으로만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아마….
완벽한 소설 속 세계를 떠올릴 때면 나는 늘 J.D.샐린저의 단편소설 <웃는 남자> - 단편집 <아홉 가지 이야기>에 수록돼 있다 - 가 생각난다. <웃는 남자>의 이야기는 액자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아홉살 꼬마들에게 운동을 가르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추장’(the chief) 의 사랑 이야기가 큰 틀이고 ‘추장’이 들려주는 액자 속 이야기 ‘웃는 남자’가 엇갈리면서 등장한다. ‘웃는 남자’ 이야기는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 인용되면서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와 (그에게서 영향 받은) 배트맨의 ‘조커’가 입이 찢어진 ‘웃는 남자’였다면 샐린저의 ‘웃는 남자’ - 역시 빅토르 위고의 영향이 있었을 것 같지만 - 는 좀더 기괴하다. 책 속 ‘웃는 남자’의 묘사는 이렇다.
중국 산적들은 아이의 머리통을 목공용 바이스에 끼워넣고서 적당한 레버를 골라 오른쪽으로 몇 번 돌렸다. 이 특이한 체험을 당한 아이는 머리칼 한 올 없는 피칸 모양의 머리를 갖게 되었고, 입 대신 코밑에 엄청나게 큰 타원형 구멍이 뚫린 얼굴로 성장했다. 코라고는 살로 꽉 막힌 두 개의 콧구멍이 전부였다. 그 결과, 웃는 남자가 숨을 쉴 때면 코 아래쪽의 흉측하고 멋대가리 없는 조그만 틈이 (내가 알기로는) 모종의 소름끼치는 액포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음, 뭔가 자세한 표정은 떠오르지 않지만 어쨌거나 기괴하게 웃는 얼굴이다.
나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아홉 살 꼬마들과 함께 추장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추장은 연재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어디에서 이야기를 끊어야 듣는 사람의 마음을 붙들지 아는 사람이었다. (아, 곧 장편소설 연재를 시작해야 하는 나로서는 꼭 사귀고 싶은 사람이다) 물론 ‘웃는 남자’가 중국과 파리의 국경을 오갔다는 등 이야기의 디테일은 엉망이지만 이야기에서 그게 뭐가 중요해! 중국과 파리가 붙어 있을 수도 있지. 추장이 버스 안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계.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서 추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가 끝나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세계, 그 평화로운 세계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추장은 메리 허드슨이라는 예쁜 여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 여기서 스포일러! - 이내 헤어지고 만다. (아니다,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는 게 무슨 스포일러야) 소설 속 두 번째 평화로운 세계는 추장과 아이들과 메리 허드슨이 함께 야구를 하는 장면이다. ‘1루를 혐오하는’ 메리 허드슨은 늘 도루를 시도했고, 아이들은 공을 잡으러 뛰어다녔고, 그 장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추장의 모습이 평화롭기만 하다.
책을 읽는 우리는 이 평화가 곧 깨질 것을 알고 있다. 이야기 속 이야기인 ‘웃는 남자’가 죽을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어른이니까. 지속되는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지나간 시절만 좋아 보인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나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 추장을 사귀고 싶다. 함께 야구를 하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이야기도 듣고 싶다. 그리고 메리 허드슨과 헤어진 후 비통해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싶다. “헤이, 추장. 네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상상할 수 없어. 그래도 웃는 남자를 꼭 죽여야 할까.” 추장의 이야기 마지막회는 웃는 남자가 죽는 걸로 끝이 난다. 추한 몰골을 보이기 싫어서 양귀비 꽃잎 가면을 쓰고 다니던 웃는 남자는 가면을 벗으며 죽음을 맞는다. 이야기를 듣던 아이 한 명은 울음을 터뜨리고, 대부분 무릎을 떨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소설 속 화자인 어린 소년의 이야기로 끝이 나는데, 정말 근사하다.
몇 분 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우연히도 내 눈에 처음 띈 것은 가로등 밑바닥에 붙은 채 바람에 펄럭거리는 한 장의 붉은 휴지였다. 그것은 누군가의 양귀비 꽃잎 가면 같았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이를 덜덜 떨면서 집으로 돌아와, 곧장 잠자리에 들라는 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랄 것이다. 어른이 될 것이고, 평화로운 세계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를 덜덜 떨면서 참아내는 비법을 터득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모두 돌려보낸 추장에게 얘기한다.
“웃는 남자를 꼭 죽여야 했어?”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그냥 사라지는 걸로 할 수도 있지 않았어? 워낙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니까, 휙 하고 사라지면서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었잖아.”
“아냐, 죽는 게 맞아.”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추장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 알아, 네 말이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