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풀들의 세계
나는 뉴욕에 가본 적이 없다. 싱가포르에도 가본 적이 없다. 럼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럼주는 내게 종교 음악 같다. 2미터 길이의 책상에서 글을 쓴다. 2미터 길이의 책상은 정확히 4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의 구역은 각각 50센티미터이다. 왼쪽에는 연필과 종이를 쌓아두고, 오른쪽에는 마실 것을 늘어놓는다. 가운데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있다. 낮에는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는 물을 마신다. 나는 런던에 가본 적이 있다. 런던의 날씨를 사랑한다. 파리에도 가본 적이 있지만, 런던의 날씨만큼 음습하지는 않았다. 뼛속 깊이 파고드는 습기와 함께 오후의 차를 마시고 나면 저녁이 찾아왔다. 책상의 맞은편에는 기타가 놓여 있다. 기타를 바라보면서 내가 연주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는 기타를 칠 줄 알지만 상상 속의 장면만큼 잘 치지는 못한다. 그래서 늘 상상만 하고 실제로는 치지 않는다. 가끔 기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는데, 그게 실제 들리는 것인지 환청인지는 분간하지 못하겠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클래식 연주를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케이블 텔레비전을 튼다. 소리는 나지 않게 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는 텔레비전을 빠져나오려고 갖은 애를 쓴다. 오페라를 볼 때도 많다. 여전히 소리는 듣지 않는다. 도끼를 들고 남자가 여자를 내려친다. 벽에 비친 도끼의 그림자가 여자의 그림자와 맞닿는 순간이다. 베르디의 한 장면인 모양이다. 나는 보스턴에 가본 적이 없다. 오클랜드에도 가본 적이 없다. 오클랜드에는 내가 좋아하는 농구팀이 있다. 스테픈 커리와 클레이 톰슨이 소속된 팀이다. 농구 역시 소리를 듣지 않고 틀어두기만 한다. 농구공이 플로어에 닿는 소리를 좋아하지만 그 소리만 들으면 나는 어질어질해진다. 농구공이 플로어에 닿는 소리는 늘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게 들린다. 선수들의 운동화가 경기장의 바닥에 끌리는 소리 사이에서 농구공의 메아리는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러브 스토리를 쓰는 중이다.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짧은 소설 <보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오늘 저녁, 나는 말보다는 보풀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나 사건이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단편들을 조사하고 있다. 아무런 형태도 의미도 없는 머나먼 삶의 조각들. 그것들은 막 생겨난 보풀 같다.” 지금 적은 문장이 소설의 전문이다. 기타의 바로 위편에는 커다란 패널이 붙어 있다. 러브 스토리의 등장인물이 거기에서 살고 있다. 관계도 속에서 A는 B를 사랑하고, C도 B를 사랑한다. D는 A를 죽이고 싶어하지만 C를 싫어하기도 한다. 나는 이야기의 전체를 알고 싶지만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러브 스토리가 끝나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 소설을 읽으려면, 내가 소설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커다란 세계를 묘사하고 싶지만 내가 알고 있는 보풀들의 세계다. 나는 보풀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는 동경에 가본 적이 있다. 나는 오사카에 가본 적이 있고, 삿포로에 가본 적이 있다. 나는 니이가타에도 가본 적이 있다. 니이가타로 가는 길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떠올렸다. 설국의 첫 문장이 거기에서 쓰여진 것이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끝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집필했던 료칸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 있다. 나는 다시 러브 스토리에 집중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다. 나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상상한다. 각각 다른 언어로 같은 사랑을 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러브 스토리 사이에다 농담을 넣었다. 제법 웃긴 농담이다. 농담 때문에 러브 스토리가 강렬해질지, 농담 때문에 러브 스토리가 재미없어질지, 아직은 모르겠다. 책상 주변의 모든 소리를 음소거해 놓으면 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어느 집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서울에 와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은 시끄러운 도시다.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고, 술집에는 술꾼들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지만, 그만큼 열렬하게 사랑한다. 런던만큼 음습하지 않지만 이곳의 겨울은 적당히 쌀쌀해서 오후의 차를 마실 만하다. 골목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나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의 근교에서 살고 있다. 이곳은 서울보다 1도 정도 춥다. 며칠 전에 산 아이패드프로에다 애플 펜슬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의 장면과 소설 속의 배경을 그려보았다. 나는 소설을 쓸 때면 늘 먼 곳을 상상한다. 동경과 니이가타보다도 먼 곳, 뉴욕보다 먼 곳, 런던이나 파리보다 먼 곳, 스톡홀름보다도 먼 곳을 상상한다. 까마득하게 먼 곳으로 날아간다. 그곳은 어쩌면 은하계의 바깥보다 먼 곳이고, 우주를 벗어나는 곳이다. 나는 계속 멀리 날아가다가 문득 옷에 달린 보풀을 본다. 보풀을 잡아서 뜯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돌아온다. 우주보다 먼 곳에서 갑자기 이곳으로 돌아온다. 이곳은 책상 앞이고, 내 앞에는 기타가 있고, 기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타 위편에는 러브 스토리의 설계도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 저자
- 리처드 브라우티건
- 출판
- 비채
- 출판일
- 2015.06.05
- 저자
- 가와바타 야스나리
- 출판
- 민음사
- 출판일
- 2009.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