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2022. 9. 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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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열심히 듣기 시작했던 중학생 때는 (BTS가 석권한 바로 그) 빌보드 싱글 차트 따위 통째로 외우고 다녔는데,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차트가 있었다. ‘어덜트 컨템포러리’라는 장르였다. 어린 마음에 ‘어덜트’라는 이름이 강력하게 다가왔는데, 뭔가 아이들은 절대 들으면 안 되는 금지의 영역 같았다. 어른들의 내밀한 생활을 가사로 적은 노래들인가? 어른들끼리 그런 노래를 따로 듣는다고? 왜? 성적인 내용이 가득 실린 노래들만 따로 모아둔 건가? 게다가 ‘컨템포러리’라니, 동시대의 어른들끼리 모여서 대체 뭘 하는 거야? 막상 어덜트 컨템포러리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덜트 컨템포러리에 대한 첫인상은 ‘재미없는 노래들의 모음집’ 이었다. 대부분의 노래들이 맨송맨송하고 미적지근했다. 아, 야하거나 은밀해서 어덜트라고 이름 붙인 게 아니라 재미없는 노래들이라서 그런 거였구나. 이런 살신‘성인’의 자세라니! “우리는 이미 글렀어. 이런 노래는 성인들만 들을 테니 어린 너희들은 신나고 재미있는 노래를 들어.” 음악을 조금 더 듣고 나서는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알게 됐지만 여전히 ‘어덜트 컨템포러리’라는 명칭을 들으면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그러고보니 한국에서도 역시 비슷한 장르의 음악들을 ‘성인 가요’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 어덜트(Young Adult)’라는 장르의 이름 역시 처음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했다. ‘젊은 어른’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어덜트 컨템포러리와는 달리, 장르의 특징을 금방 이해했다. 한국어로 풀이하자면 ‘청소년 소설’인 영 어덜트 소설은 12살에서 18살을 타깃으로 삼지만 독자의 절반은 어른들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해리 포터>, <헝거 게임>, <메이즈 러너> 같은 작품들처럼 어른들도 열광하는 소설이 많다.

영 어덜트 소설이 청소년뿐 아니라 모든 연령층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내가 꼽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모험’ 이다. 대부분의 영 어덜트 소설은 도전하고 모험하고 성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젊기 때문에 실패해도 괜찮은, 어리기 때문에 한번쯤 좌절을 겪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삶을 다루고 있다. 청소년들은 영 어덜트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현재를 보겠지만, 어른들은 모험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볼 것이다.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영 어덜트라는 단어의 느낌은 사뭇 달라진다. ‘영’에다 초점을 맞추면 아직 성인이 아니지만 충분히 성숙한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어덜트’에 초점을 맞추면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 혹은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철들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고.

제이슨 라이트먼의 영화 <영 어덜트>는 영 어덜트 소설을 쓰는 작가 메이비스(샤를리즈 테론)가 주인공이다.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도시로 간 메이비스는 대필 작가로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지는 못했지만 영 어덜트 소설 <웨이벌리 고교> 시리즈의 집필에 참여하며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한다. 마감에 쫓기고 글을 쓰고 술을 마시고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루를 보내던 삶을 반복하던 메이비스는 어느날 고등학교 시절의 남자친구 버디에게서 전자우편 한 통을 받는다. 전자우편 속에는 버디의 딸 사진이 들어 있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일까 고민하던 메이비스는 ‘옛 남자친구와 재결합하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젊은 시절을 되찾기 위해 갑자기 차를 몰고 고향 머큐리로 향한다. <영 어덜트>는 고향에 돌아온 메이비스가 벌이는 좌충우돌 모험기다.

고향에 돌아와보니 변한 게 거의 없다. 친구들도 그대로고, 부모님도 그대로다. 딱 하나, 자신을 좋아하던 옛날 남자친구 버디만 변했다. 버디는 아내 베스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메이비스가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 아무리 유혹해도 버디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학창 시절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아웃사이더 매트와 자꾸만 짜증나게 엮이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이른바 ‘퀸카’였던 메이비스가 고향에 돌아와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셈이다.

영화의 제목 ‘영 어덜트’는 주인공 메이비스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 ‘어덜트’가 되어 고향을 떠났지만, 자신의 ‘영’한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메이비스의 현재다. 메이비스는 고향의 서점에서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자신이 참여한 책 <웨이벌리 고교>를 버디에게 선물하기 위해 서점에 들어간 메이비스. 서점 직원에게 책의 위치를 묻자 직원은 한쪽 구석의 특별 매대를 가리킨다. <웨이벌리 고교>가 한가득 쌓여 있다.

“와우, 인기가 정말 많나 보네요.”

“몇 년 전엔 잘 나갔죠. 지금은 처분해야 될 재고가 너무 많아요. 선반에 얹지 말라고 해서 이쪽에 모아둔 겁니다.”

메이비스의 처지가 딱 그렇다. 몇 년 전엔 잘 나가던 ‘퀸카’였지만 이제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 메이비스는 서점 직원에게 자신의 신분을 당당하게 밝힌다.

“내가 이 책을 쓴 사람이에요. 사인해 드릴까요? 원하는만큼 해드릴게요. 프리미엄 붙여서 팔 수 있어요.”

서점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덧붙인다.

“예, 그렇겠죠. 하지만 일단 사인이 되면 출판사에 돌려보낼 수가 없어요.”

“왜 출판사에 돌려보내죠?”

“시리즈는 끝났고, 이제 책을 안 팔 거니까요.”

시리즈는 끝났다. 젊은 시절은 끝났다.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책을 써야 한다. 메이비스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메이비스는 헤어진 옛날 남자친구에게, 게다가 결혼까지 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매트가 그 이유를 물어보자 메이비스가 공허한 눈빛으로 말한다.

“걘 내 전성기를 알아.”

메이비스의 마음을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다. 자신의 현재는 공허하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고 오직 찬란해 보이는 것은 과거뿐이니, 그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쟁취하면 현재와 미래가 다시 환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매트가 단호하게, 그러나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그땐 네 전성기가 아니야.”

매트의 다음 대사 역시 절절하지만, 영화의 작은 반전이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두 사람은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생애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는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가끔 생애 최고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한다. ‘라떼(나 때는 말이야)’를 동원해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생애 최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죽기 직전뿐이지 않을까? 섣불리 최고를 말하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결례가 아닐까?

메이비스가 소설가라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가는 이야기 속에 살고, 시작과 끝을 여러 번 겪는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여러 번 상상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과 삶은 다르다. 메이비스는 소설 속에 파묻혀 현실을 잊은 것이다. 소설의 시작과 끝을 알 듯 현실의 시작과 끝을 안다고 착각한다. 현실 속 메이비스는 앞으로도 수많은 시간을 겪어야 한다.

영화는 메이비스가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쓰는 것으로 끝난다. “켄달(소설 속 주인공)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제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됐다. 미래를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녀의 새로운 챕터가 열릴 것이다.”

주인공 메이비스가 진짜 삶을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깨달은 척하는 것인지, 전성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지, 과거에 계속 집착할지 알 길이 없다. 영화는 끝났고, 이런 질문이 남았다.

당신의 전성기를 과거에서 찾을 것인가, 현재나 미래에서 찾을 것인가.

 

 
영 어덜트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시골을 떠나 도시로 상경한 메이비스(샤를리즈 테론)은 대필작가로서 나름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의 하루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신 또한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과거 연인이였던 버디(패트릭 윌슨)의 아이 사진을 받게 된다. 메이비스는 버디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평점
7.4 (2011.01.01 개봉)
감독
제이슨 라이트만
출연
샤를리즈 테론, 패튼 오스왈트, 패트릭 윌슨, 엘리자베스 리저, 콜렛 울프, 질 에이켄베리, 리처드 베킨스, 메리 베스 허트, 케이트 노린, 헤티엔 박, 존 포레스트, J. K. 시몬스, 제니 데어 폴린, 루이자 크라우스, 엘리자베스 워드 랜드, 브라이언 맥엘해니, 브래디 스미스, 팀 영, 에린 다크, 지 영 한, 엘라 래 펙, 알레이샤 알렌, 올라 캐시디, 찰스 테크먼, 에밀리 미드, 마이클 나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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