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없이
인간은 동물이나 식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까? “나무야, 물 많이 먹고 쑥쑥 자라라.” “아구, 우리 귀염둥이 댕댕이가 심심했어요?” 라며 식물과 동물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 “……, 멍, 멍.”
자신의 반려동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며, 텔레파시로 통하는 사이라며, 믿지 못하겠지만 진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반응이 그들의 진짜 생각인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정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배고프거나 춥거나 불편하다는 기색을 알아차리는 것은 간단한 문제이지만, 그들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나아지길 원하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식물, 동물과 소통을 꿈꾸는 인간들은 마음껏 상상력을 펼친다. 동물들의 캐릭터에 선악을 부여하고 싸움을 붙인다. 개나 토끼나 코끼리는 착한 편으로 만들고 하이에나, 쥐, 늑대는 악의 상징이 된다. 동물들이 이런 상황을 알고 나면 기가 막힐 것이다. “우리가 뭘 어쨌다고…….”라는 하소연을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의 선입견이겠지. 인간의 상상력 따위 관심 없을지도 모르겠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유명한 동화작가이자 소설가 로알드 달이 쓴 단편소설 <소리 잡는 기계>에는 기괴한 발명품이 등장한다. 식물의 소리를 듣는 기계다. 주인공 클라우스너는 이런 주장을 펼친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가 언제나 가득 차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높은 음역에서 새롭고 멋진 음악이, 미묘한 화음이나 귀를 찢는 듯한 불협화음이, 너무나 강렬해서 듣기만 해도 미쳐버릴 수 있는 그런 음악이 들려올지도 몰라요.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클라우스너는 기계를 통해 1초에 13만 2천 번 진동하는 장미의 비명을 확인했다. 데이지의 비명도 들었다. 실험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선택한 것은 공원의 너도밤나무. 나무에다 도끼날을 박자 으르렁거리는 듯한 저음의 비명이 들려왔다. 클라우스너는 드디어 식물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알게 되었다. 클라우스너는 자신의 발명품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의사 스콧을 급하게 부른다. 실험 결과를 보여주려는 순간 나무의 반격이 시작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소설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미친 주인공의 황당한 행동을 보여주는 단편소설 같지만 인간이 자연에게 벌이는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연을 희생물로 삼았는지 모른다. 만약 인간이 식물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면, 세상의 나무들로부터 가장 험한 욕을 듣게 될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어 정교한 철학을 발명했다. 언어로 소통하며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게 됐다. 문자와 말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마음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때로는 문자와 말이 칼로 변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고, 미개하다 칭하며 정복하기도 했다. 가장 잔인한 별명으로 상대를 놀리는 아이들, 상대가 가장 아플 만한 단어들로 공격하는 악플러들, 칼보다 더 아픈 욕설로 상대를 찌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발명한 언어가 인간을 잡아먹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사람들이 명상에 관심을 갖게 되고, 혼자만의 시간을 추구하는 것은 문자와 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인지도 모른다. 댓글이 없는 세상, 욕이 없는 세상, 무의미한 대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생각을 굳이 말로 해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생각조차 사라지는 시간.
영화 <소리도 없이>를 보면서 인간에게 언어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됐다. <소리도 없이>는 생계를 위해 부업으로 범죄 조직의 뒤처리를 하며 근면 성실하게 살아가는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의 이야기다. 뒤처리란 간단한 게 아니다. 살해당한 사람의 시체를 정리하고 땅에 파묻는 일이다. 이런 일을 근면 성실하게 한다는 게 웃기게 들리겠지만, 말 그대로 태인과 창복은 무덤덤하게 그 일을 처리한다. 열심히 땅을 파고, 고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결국 살인을 돕는 일이다. 태인이라는 존재가 유독 눈에 띈다. 그는 영화 내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영화 뒷얘기를 잠깐 하자면, 홍의정 감독은 유아인 배우에게 캐릭터 형성에 참고하라고 고릴라 영상을 보내줬다고 한다. 영역을 침범당한 고릴라처럼 표현해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유아인 배우가 연기하는 태인은 정말 고릴라처럼 보인다.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고릴라는 육식 동물이 아니다. 채식을 위주로 하고 개미 정도만 먹는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행동 때문에 성격이 포악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온순하고 지능도 높다. 태인이라는 인물과 딱 어울리는 동물이다.
태인과 창복은 잘못된 선택을 거듭하다가 유괴당한 아이 초이(문승아)를 떠맡게 된다. 살인을 도와주는 일을 하다가 유괴를 돕는 일까지 하게 되는 셈이다. 두 사람은 아이도 지켜내고 돈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잘못된 선택 이후의 최선은 대개 최선일 확률이 낮고, 영화는 그 과정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유괴된 초희는 시체 치우는 두 아저씨의 일상을 묵묵히 바라본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로 꽃을 그리기도 한다. 초희에게 살인 현장은 놀이터가 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태인이 발로 핏자국을 지우는 장면이다. 아무도 없었더라면 상관없을 핏자국, 나중에 한꺼번에 치워도 되는 핏자국인데 초희가 보는 순간 태인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대놓고 핏자국을 닦지도 못한다. 태인은 슬그머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신발로 핏자국을 문질러 지우려고 한다. 그 행동을 초희가 지켜본다.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태인의 부끄러움이 조금씩 적립된다.
태인은 전에도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부적절하고 부도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존이 먼저였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일도 감수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태인이라는 캐릭터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부끄러움을 깨닫는 순간을 절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말로 사과한다. 미안해, 잘못했어, 내 잘못이야. 그 말을 꺼내는 순간의 감정은 참으로 미묘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신을 아주 조금 용서한다. 꺼내기 힘든 말이었는데, 잘한 선택이야, 사과하길 잘했어, 잘못을 인정하는 나, 칭찬해. 반대로 사과하면서 무너지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마지막 자존심까지 무너지고야 마는 사람도 있다. 말이 꺼내지는 순간, 우리가 조금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건 확실하다. 말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바꾼다.
나는 문자를 이용하여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느끼는 것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크다. 적당한 언어를 찾기 힘든 순간이 잦다.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굴러다니던 순간의 감정이 분노인지 환멸인지 수치인지 슬픔인지 자괴인지 잘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언어가 아무리 많이 생겨도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소리도 없이>의 결말에서 계속 달리는 태인의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부끄러움인지 두려움인지 고통인지 환멸인지 속죄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배우 유아인이 표현하는 태인을 바라볼 뿐이다. 어떤 순간은 말이 아니라 감정의 색채, 혹은 감정의 덩어리로 기억된다.
나는 인간이 발명한 최고의 발명품이 언어라고 생각하지만, 또한 언어가 인간의 치명적인 한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섯 시간 동안 힘겹게 올라간 산의 정상에서, (문자 그대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로움에 넋이 나갈 수 밖에 없는 그 순간에 “대박!”이라고 말해 버린다면,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 싶다. 감정의 모든 색채를 느끼고 싶다. 감정의 티끌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모호한 것을 더욱 모호하게 받아들이는 나무 같은 존재이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문자를 이용해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