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암모나이트와 더 디그

김중혁 2022. 10. 23. 10:00
728x90
반응형

영화 <인디아나 존스- 마지막 성배>의 촬영지였던 요르단 남부의 페트라에서 최소 2천150년 전의 고대 유적이 발견된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보면서 꿈과 모험을 키웠던 사람들이라면 가슴이 콩닥거릴 뉴스였다. 우리 발밑에 대체 뭐가 묻혀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페트라는 기원전 7~2세기 나바테아인들이 사막 한가운데의 바위산에 건설한 도시로 1812년 스위스 탐험가 요한 부르크하르트가 신비로운 건축물들을 발견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나바테아인들이 기록 문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의 외양을 보고 용도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많은 과학자들이 남겨진 흔적과 물건을 통해 과거를 해석하고, 과거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삼엽충>을 쓴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는 ‘고생물학은 화석 껍데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분야’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껍데기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화석이 되는 것은 거의 언제나 내구성 있는 광물질로 된 단단한 뼈대뿐이기 때문이다. 드물게 예외가 있긴 하지만, 부드러운 해부구조는 거의 남지 않는다. …… (중략) …… 삼엽충 껍데기는 해양동물 10여 종류의 껍데기들처럼 단단한 방해석 광물로 만들어졌다. 게 껍데기는 방해석으로 되어 있고, 조개류의 껍데기도 그렇다. 삼엽충이 단단한 껍데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사실상 우리의 눈에 띄지도 못했을 것이다.”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했지만, 결국 우리 지구의 생명체들은 껍데기로 남는다. 고생물학자들은 시간을 더 자주, 더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생물학자 매리 애닝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암모나이트>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짧은 사랑을 해야 하는 인간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매리 애닝은 잉글랜드 남부 도싯 주의 라임 리지스의 절벽에서 이크티오사우루스 등 쥐라기 해양 생물의 화석을 발견한 고생물학자다. 매리 애닝의 발견으로 고생물과 지질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왕립학회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매리 애닝을 선정했다.

<암모나이트>에는 두 개의 사건이 축을 이룬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화석을 탐구하는 일에 인생을 바친 과학자로서의 매리 애닝(케이트 윈슬렛)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샬럿 머치슨(시얼샤 로넌)과의 슬픈 사랑을 다룬다. 끊임없이 과거와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것이 과학자로서의 삶이라면, 함께 살아갈 미래의 날을 꿈꾸는 것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삶이다. 매리 애닝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영화 <암모나이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생물학자로서 화석을 발견하는 매리 애닝의 모습이다. 돌멩이와 흙 사이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했는지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절벽에 박혀 있는 화석을 꺼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도, 도시락으로 싸온 빵을 집어먹을 때도 그 사람이 사랑하는 일이 보인다. 직업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아무리 멋진 말을 해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배우 케이트 윈슬렛은 고생물학자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화석을 다듬는 법을 직접 배웠고, 손 대역을 쓰지 않았다. 손톱 사이에 낀 먼지와 거친 마디를 보고 있으면 아주 오랫동안 화석을 채취해온 사람 같다.

매리 애닝이 채취한 화석을 사려던 손님이 흥정을 시작하자, 사랑에 빠진 샬럿 머치슨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이 화석을 발굴하기 위해 애닝 씨가 들인 육체적 노역을 생각하면 가격이 꽤 적당한 것 같은데요. 이렇게 온전한 표본으로 만들기 위해 들인 시간은 또 어떻고요. 이 표본은 애닝 씨의 고된 땀방울일 뿐 아니라 수십 년간 쌓인 지식의 집약체란 것도 잊으시면 안 되죠. 애닝 씨가 아닌 무식한 사람들 눈에는 그저 돌덩어리였을 테니까요. 과학계에서 애닝 씨의 작업을 왜 그리 칭송하겠어요? 우리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 보여주기 때문이죠. 이 모든 걸 고려해 값을 정하시면 어떨까요?”

실로 장황한 웅변이고, 감독이 말하려는 바가 너무나 집약되어 있어서 조금은 민망하기도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가끔 껍데기를 그저 껍데기로만 보고, 껍데기 뒤의 시간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식당에서의 음식 한 접시, 스포츠 선수의 경기 결과, 한 곡의 음악, 한 편의 소설, 손으로 직접 만든 작은 인형, 새로운 서비스를 알리는 웹 페이지……, 그 모든 것들의 뒤에는 인간의 시간이 들어 있다.

샬럿 머치슨의 말은 ‘사랑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사랑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는 것에 가깝다. 잘 보이지 않고 묻혀 있던 한 사람의 감정을 온전히 캐내어 다듬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샬럿의 말처럼 ‘그 사람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 이해해야 가능한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껍데기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추상 명사가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면 추상 명사는 딱딱한 화석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 시간이 우리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주의 시간은 무척 길다. 오히려 그 때문에, 짧은 인간의 삶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진다. 이토록 짧은 생애 중에 누군가를 강렬히 원하다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영화 <더 디그>의 주인공인 발굴학자 배질 브라운(레이프 파인스) 역시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다. 1939년 배질 브라운은  영국 동부 해안 지역인 서튼후(Sutton Hoo)에서 앵글로색슨 족이 만든 배의 흔적을 발견했다. 발굴 소식이 알려지면서 캠브리지 대학의 고고학자 찰스 필립스가 찾아와 왕실 발굴단의 소속으로 발굴지를 접수해버린다. 배질 브라운은 정식 학위를 받지 못한 아웃사이더 발굴자였기 때문에 항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주변 청소나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발굴지의 땅 주인이자 배질 브라운에게 발굴을 의뢰했던 이디스 프레티(캐리 멀리건)는 유물들을 대영박물관에 양도하는 대신 배질 브라운의 공로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디스 덕분에 겨우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된 배질 브라운의 이야기 역시 시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수백 수천 년 전의 흔적에다 인간의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토록 짧은 삶을 살면서 아주 긴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가장 훌륭한 장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디스 프레티의 어린 아들은 배질 브라운이 발견한 앵글로색슨의 배를 우주선으로 상상한다. 엄마와 함께 상상 속의 우주 여행을 출발한다. “대기권 경계로 가고 있어요, 보여요, 어머니? 우주를 향해 항해하는 거예요. 오리온의 허리띠요. 왕비를 고향으로 모시는 거예요. 긴 항해를 한다고 백성들이 보물을 잔뜩 실어줬어요. 왕비는 지구를 지나 우주로 갔어요. 우주는 재미있는 곳이에요. 우주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요. 5백 년이 순식간에 지나가죠. 왕비가 지구를 내려다봤을 때 어른이 된 왕비의 아들은 우주 비행사가 돼 있었어요.”

7세기경에 만들어진 배를 1939년에 발굴하고, 그 배를 타고 우주 여행을 떠난다는 상상의 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오래된 과거의 화석을 끊임없이 발굴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들 역시 언젠가는 멸종하여 껍데기로만 남을 것이다.

고생물학자들은 길고 긴 시간을 연구하면서도 덧없는 삶에 절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멸종 연대기>를 쓴 과학 저널리스트 피터 브래넌은 영국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를 인용했다. “눈이 내렸네, 눈 위에 눈이/ 눈 위에 눈이, 오래전/ 암울한 한겨울에.” 시간은 쌓이고 우리는 비록 껍데기가 되거나 이름만 남겠지만, 사랑이라는 개념을 열렬히 사랑하고, 대화하기 위해 언어를 발명하고, 길고 긴 우주의 시간을 상상할 줄 아는 존재들로 기억될 것이다.

 

 
암모나이트
“긴 시간의 끝, 그곳에 네가 있었다”  1840년대 영국 남부 해변 마을,생계를 위해 화석을 발굴하는 고생물학자 ‘메리’는그곳으로 요양을 위해 내려온 상류층 부인 ‘샬럿’을 만난다.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거친 해안에서 화석을 찾으며, 그렇게 기적처럼 서로를 발견하고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올봄 당신의 마음에 각인될 강렬한 러브 스토리가 시작된다!
평점
6.7 (2021.03.11 개봉)
감독
프랜시스 리
출연
케이트 윈슬렛, 시얼샤 로넌, 피오나 쇼, 앨릭 세커리아누, 제임스 맥아들, 마이클 팍스
 
더 디그
영국의 한 미망인이 알려지지 않은 고고학자를 고용하여 그녀의 사유지에 있는 둔덕을 파헤치고, 거대한 유물을 발견하게 되는 실화를 다룬 영화
평점
6.8 (2021.01.29 개봉)
감독
시몬 스톤
출연
캐리 멀리건, 랄프 파인즈, 릴리 제임스, 자니 플린, 벤 채플린, 켄 스탓, 아치 반스, 모니카 돌런, 아셔 알리, 에일린 데이비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