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2022. 11.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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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전문 블로거인 제프 마노는 도시를 색다르게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도둑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실제 도둑질을 하라는 게 아니라 ‘만약 내가 도둑이라면 저 건물에 어떻게 침입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건물을 보는 순간,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도둑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건축을 잘 이해하는 자들이다. 건물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무단으로 들락거리고, 건물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한계를 무시한다. (……) 건축물을 오용하고, 남용하고, 건축 목적과는 정반대로 이용함으로써 이들은 건물들의 ‘진짜’ 사용법을 밝혀낸다.”


그의 책 <도둑의 도시 가이드>는 그런 마음을 실행에 옮겼던 도둑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은행을 털기 위해 실제 은행과 똑같은 모형을 3년 동안 제작했던 사람의 집념에는 혀를 내두르게 되고, 도둑질을 하러 들어갔다가 자기가 침입한 집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해 직접 경찰을 부른 멍청한 도둑의 이야기에는 배꼽을 잡고 웃게 된다. 책에는 머리가 비상한 도둑보다 멍청한 도둑의 이야기가 좀더 많다. 도둑질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도둑질을 하고 잡히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걸 교훈으로 알려주고 있기도 하다. 책 속에서 가장 웃겼던 대목은 뉴욕의 아파트 도둑 이야기였다.


식당 옆에 붙어 있는 아파트에 침입해 벽에 구멍을 낸 다음 팔을 넣어 손에 잡히는 대로 음식을 들고 나온 도둑이다. 초콜릿 수플레 컵케이크, 삼겹살, 사케 한 병 같은 물품을 훔치기 위해서 아파트 벽에 구멍을 낸 것이다. 이런 경우를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해야 하나,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다 태운다고 해야 하나. 책에 자세한 정황은 생략돼 있어 도둑의 모습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오늘은 어떤 음식이 손에 잡힐까 기대에 찬 도둑의 표정이 떠오른다. 벽에 얼굴을 밀착시킨 채 팔을 쑥 집어넣고 이리저리 더듬으면서 손끝에 닿는 촉감을 파악하려는 도둑의 절실한 표정이 떠오른다. 정말 그럴 일인가 싶다. 아마도 가난해서 먹을 것을 훔치는 게 아니라 벽에서 음식물을 훔쳐내는 재미에 중독된 사람일 것이다.


벽을 통해 음식을 훔치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다 미란다 줄라이의 영화 <카조니어Kajillionaire>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가 시작되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정체 불명의 세 사람이 등장한다. 나이든 남자, 나이든 여자, 젊은 여자. 나이든 남녀는 명령을 내리고, 젊은 여자는 마치 체조를 하듯 점프를 하고 엎드리고 몸을 낮게 하여 우체국으로 잠입한다. 우체국 사서함 문을 하나 열어 그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는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옆칸에 있는 우편물을 힘겹게 훔쳐 나온다. 인형, 우편환 20달러, 넥타이가 전부다. 세 사람은 가족 사기단이자 가족 좀도둑이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딸은 공중전화기에서 잔돈을 긁어모으거나 쿠폰을 현금으로 바꾸어 쓰는 등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도 기묘하다. 버블스 주식회사에 딸린 창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매일 같은 시간 집의 천장에서 거품이 흘러내린다. 월세가 싸지만 거품을 걷어내지 않으면 건물 자체가 썩어버릴 수도 있다.


딸의 이름을 ‘올드 돌리오’라고 지은 것도 사기의 연장선상이었다. 복권에 당첨된 어떤 노숙자에게서 이름을 따온 것인데, 상속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노숙자 올드 돌리오 아저씨는 암 치료 임상실험에 복권 당첨금을 전부 탕진해버리고 말았다. 딸 올드 돌리오는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딸의 작명에서 알 수 있듯 부모는 딸의 삶과 미래에 큰 관심이 없다. 그저 사기단의 한 명일 뿐이라 생각하고, 다정한 말도 해주지 않으며 부모와 자식 사이의 스킨십도 없다. 수익의 3분의 1을 정확하게 배분해주는 동료라고 생각한다. 딸 역시 그런 삶에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의 몸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공짜 마사지 쿠폰을 얻게 된 딸이 마사지 숍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는 가슴 아프다. 최소한의 힘을 실어서 살살 만지는데도 ‘너무 세다’라는 말만 반복한다. 평생 누군가의 손길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살살 만져도 아플 수밖에 없다. 마사지를 해주던 사람은 결국 몸에서 손을 떼고 가짜 마사지를 해준다. 그제야 올드 돌리오는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부모 세대와 딸의 관계는 요즘 한창 세계적인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미국의 경우에는 1946년부터 1965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와 ‘MZ 세대’(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에 태어난 ‘Z세대’를 아울러 이렇게 부른다)의 은유 같기도 하다. 집으로 흘러 들어오는 버블을 치우는 설정은 경제를 온통 망가뜨린 세대가 자식 세대와 함께 뒷감당을 하는 이야기의 은유 같다. 앤 헬렌 피터슨은 <요즘 애들>에서 ‘좋은 양육’이란 이름으로 MZ세대에게 행해진 ‘집중 양육’이 나쁜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아동의 일상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훗날 일터에 진입할 때를 대비한 최적화 과정인 것이다. 그렇게 아동은 성년을 한참 앞둔 나이에 작은 성인이 되고, 그에 수반되는 불안과 기대 역시 끌어안는다.”


아이를 아이답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해야 할 파트너로 키운 셈이다. 노는 법을 잃어버렸고 부모의 실패가 자신의 실패인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2019년에 코미디언 댄 시한(Dan Sheehan)은 베이비붐 세대에 대해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를 마지막 한 칸만 남겨놓고선 자기가 휴지를 갈 차례가 아닌 척했다. 그것도 사회 전체에.”라는 말로 비꼬았는데, <카조니어>에 나오는 부모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올드 돌리오가 친구 멜라니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태어나서 한번도 춤을 춰본 적이 없는 올드 돌리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올드 돌리오의 춤은 영화 시작 부분에 나왔던 바로 그 동작이다. 연방 우체국에 잠입하기 위해, CCTV에 잡히지 않기 위해 점프하고 구르고 몸을 구부렸던 동작이 그녀의 춤이 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춤 동작이다.
세 가족과 친구 멜라니까지 가세해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사기를 치는 장면에서는 등골이 서늘해진다. 침대에 누워 임종을 앞둔 늙은 남자는 네 사람이 자신의 집을 털어 갈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개의치 않는다. 대신 네 사람에게 ‘사람이 사는 집처럼 소리를 내달라는 주문’을 한다. 사람들의 대화,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스포츠 채널 소리,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마음이 평온해진다. ‘피아노도 쳐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늙은 남자가 죽기를 기다리면서 네 사람은 화목한 가족인 것처럼, 일상의 소중함을 마음껏 만끽하는 가족인 것처럼 연기를 한다.  아빠는 소파에 앉아서 가짜 케이크를 먹으며 잔디를 깎을 계획에 대해 말한다. 엄마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접시를 닦고 있다. 딸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일상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를 연기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죽기 직전의 늙은 남자는 자신의 집에 찾아든 도둑에게 마지막 유언을 이야기한다.


“부탁인데, 집은 건들지 말아줘. 애들이 물려받아야 해서. 나쁜 애들은 아냐. 그냥 바쁠 뿐이지.”


영화 <카조니어>를 다 보고 나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의 감정이 진짜인지, 혹은 진짜인 것처럼 연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어쩌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 상태일 것이다. 텅 비어버린 집에서 올드 돌리오는 좌절하지 않는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낸다. 우리 모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카조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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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7.8 (2020.01.01 개봉)
감독
미란다 줄라이
출연
에반 레이첼 우드, 지나 로드리게스, 리차드 젠킨스, 데브라 윙거, 다바인 조이 랜돌프, 다이아나 마리아 리바, 마크 이바니어, 애덤 바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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