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하트 오브 더 씨

by 김중혁 2022. 11. 18.
728x90
반응형

오랫동안 살까말까 고민하던 빔 프로젝터를 드디어 샀다. 한적한 시골로 작업실을 옮긴 후 커다랗고 하얀 벽을 볼 때마다 ‘아, 저기는 프로젝터 쏘기 딱 좋은 벽이네.’라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나 모른다. 동굴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리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피와 얼을 물려받은 후손답게 벽만 보면 뭔가 채우고 싶은 모양이다.


빔 프로젝터만 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군대 훈련병 시절, 야외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임권택 감독의 반공 영화 중 하나였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야외에서 동료와 함께 영화를 보던 순간은 또렷하게 떠오른다. 해가 진 이후 커다랗고 낡은 벽에 빔 프로젝터를 쏘았다. 허공을 꿰뚫는 빛과 그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를 보며 영화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한 일인가 새삼 느꼈다. 뜬금없이 고향집이 생각나기도 했다.


비싼 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저렴한 빔 프로젝터를 구입했다. 초고화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빛을 쏘고 그 빛이 날아가는 흔적을 보고, 그 빛이 자아내는 영상을 보면 되니까 비싼 건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빔 프로젝터를 처음으로 쏘아보는데, 와……, 내 작업실에 먼지가 이렇게 많았나 새삼 느꼈다. 먼지가 보이는 것말고도 불편한 점이 있었다. 고가의 빔 프로젝터라면 주변의 밝기가 상관없는데, 내가 구입한 중저가 모델은 영화 감상을 제대로 하려면 주변의 빛을 모두 꺼야 했다. 어두울수록 영상은 더욱 또렷해졌다. 어두우니까 영화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장점이지만, 어두워서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단점이었다. 간단한 영상을 보려고 해도 불을 다 끄고 창에는 암막 커튼을 쳐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에만 집중해야 하는 게 싫어서 극장에 가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 사람들 마음도 이해된다.


새로 산 빔 프로젝터로 어떤 영화를 볼까. 구독하고 있는 OTT를 뒤지기 시작했다. 큰 화면이 어울리는 대작 영화가 좋겠지. 소리가 중요한 영화, 모험으로 가득하지만 시적이기도 한 영화, 자연 앞에서 초라해지는 인간에 대한 영화면 좋겠지.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 <하트 오브 더 씨>를 골랐다.


<하트 오브 더 씨>는 허먼 벨빌의 유명한 소설 <모비 딕>이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19세기경, 난폭하기로 유명한 향유고래 ‘모카 딕’이 포경선 ‘에식스 호’를 침몰시킨 사건이 있었다. 소설가 허먼 멜빌은 ‘에식스 호 침몰 사건’의 생존자 중 한 명을 찾아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허먼 멜빌은 이야기 듣는 값을 지불하고, 80톤 무게의 향유고래가 238톤의 배를 10분 만에 침몰시키는 이야기를 듣는다.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망망대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이야기를 듣는다. 허먼 멜빌은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각색해 <모비 딕>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한 편을 탄생시켰다. 너새니얼 필브릭의 논픽션 <바다 한가운데서>가 원작이다.


영화를 절반쯤 봤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장면이 너무나 익숙하고, 모든 대사를 이미 들은 듯하고, 내가 예상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모비 딕>을 읽었고, ‘모카 딕’의 이야기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무리 그래도 모든 장면을 이미 본 듯했다. 예전 메모를 찾아보았더니, 정말 이미 본 영화였다. 오래 전의 나는 꼼꼼하게 메모를 해두었고, 감상평도 적어두었다. 낸터킷의 명문가 출신 선장 폴라드와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실력 있는 1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의 대결 구도에 대해서도 잘 정리해두었다. 이렇게 정리를 잘해두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무서웠다. 꼼꼼함과 깜깜함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내가 두려웠다.


가장 두려운 일은 이런 일이 잦다는 것이다. 이미 읽은 책을 읽은 줄도 모르고 다시 사서, 다시 읽다가 뒤늦게 깨닫고, 두 권의 책을 비교해보니 똑같은 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맙소사. 변하지 않은 내가 놀라웠고, 똑같은 곳에 밑줄을 그으면서도 몰랐던 내가 놀라웠다. “이 노래 너무 좋네,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둬야지.” 하고 플레이리스트를 확인하면 이미 들어 있고, 메일 답장을 하려고 보면 이미 나는 답장을 한 상태고……, 수많은 내가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이야기를 소상하게 쓰는 이유는, 나와 비슷한 일이 잦은 사람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나는 나의  ‘망각’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개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으며, 여러 존재는 서로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어떤 영화나 책 때문에 두 개의 존재가 가끔 맞닥뜨릴 뿐이다.


다른 합리화도 있다. 나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일을 숨쉬기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쉬었던 숨을 모두 비교해보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내가 보고 읽고 듣는 모든 것들이 숨처럼 몰래 들어와 내 살과 피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합리화도 있다. 나는 영화나 책이나 음악을 접한 후에 무의식적으로 그걸 잊어버리려 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리듬이며, 기억해야 할 것은 내용이 아니라 마음이며, 그 세계를 기억하는 대신 통과하고 체험하여 온전히 내 것으로 ……, 그만하자, 지나친 합리화로 가고 있다.


큰 화면으로 다시 본 <하트 오브 더 씨>는 새로웠다. 극장에서 보았더라면 더욱 실감이 났겠지만, 빔 프로젝터로도 비슷한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바다에서의 모험이 자주 등장하는데, 물이 넘실거리는 장면을 계속 보고 있으니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예전 메모를 읽어보니 생각이 달라진 지점도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1등 항해사 오웬 체이스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았을 때는 선장 폴라드의 성장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의 입장을 대변하던 폴라드가 영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독립적인 선택을 한다.


인간과 고래의 싸움으로 출발한 영화는 차츰 인간과 인간의 싸움에 초점을 맞춘다. 선장과 1등 항해사는 사사건건 대립하고,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다. 선장은 1등 항해사보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컴플렉스가 있고, 1등 항해사는 선장의 미숙한 결정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두 사람이 딱 한 번 의견 일치를 보일 때가 있다. 고래들이 모여 사는 환상의 장소가 있다는 정보를 얻은 두 사람은 그곳에 가서 고래 포획을 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에 합의한다. 1등 항해사는 고래 기름을 가득 채워 가면 다음 항해에 선장 자리를 보장받기로 했다. 선장은 무사히 돌아가면 자신의 리더십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싸우지 않고 처음으로 공동 목표에 합의한 순간, 영화의 비극이 시작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두 사람은 손 잡고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연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도 늘 여러 사람이 싸우고 있다. 선장처럼 인정 욕구를 원하는 사람도 있고, 1등 항해사처럼 더 높은 성공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1등 항해사처럼 논리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장처럼 막무가내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두 사람이 끝까지 싸웠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당한 타협이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상대를 위한 양보는 서로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이지만, 적당한 타협은 잘못된 길로 한 발 내딛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여러 존재들이 계속 싸우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나를 견제하고, 내가 나와 토론하고, 내가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그걸 바로잡는 내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 합리화. 내가 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내가 읽고 듣고 보았던 것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다시 체험하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

 

 

 
하트 오브 더 씨
조난된 21명, 80톤의 고래, 94일간의 표류, 7200km의 망망대해… 걸작 ‘모비딕’을 탄생시킨 에식스호의 실화 어두운 밤, 허먼 멜빌은 급한 발걸음으로 누군가의 집을 찾는다. 그는 바로 94일간 7,200km 표류했던 21명의 조난대원들 중 살아남은 8명 중 한 사람. 허먼 멜빌의 끈질긴 요청과 부인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지옥과도 같았던 그 때의 기억을 조심스레 꺼낸다. 1819년 여름, 포경선 에식스호는 낸터킷 섬에서 항해에 올랐다. 그러나 15개월 뒤, 남태평양의 한가운데서 길이 30m, 무게 80톤의 성난 향유고래의 공격을 당하면서 238톤의 배가 단 10분 만에 침몰한다. 침몰한 배에서 살아 남은 21명의 선원들은 3개의 보트에 나눠 타고 육지를 찾아 나서지만 남아있던 건빵도 식수도 떨어져 간다. 가족보다 더욱 끈끈했던 그들은 거친 폭풍우와 절망, 고독, 양심과 싸우면서 먹을 것도, 희망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으로서 가장 비극적인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
평점
7.5 (2015.12.03 개봉)
감독
론 하워드
출연
킬리언 머피, 벤 위쇼, 크리스 헴스워스, 샬롯 라일리, 브렌단 글리슨, 벤자민 워커, 폴 앤더슨, 조셉 마윌, 톰 홀랜드, 미첼 페어리, 도널드 섬터, 프랭크 딜레인, 조르디 몰라, 제이미 시브스, 샘 킬리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