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집>은 세 아이의 이야기다. 매일 다투는 부모님이 고민인 열두 살 ‘하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게 너무 싫은 ‘유미’와 ‘유진’ 자매. 세 아이는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하나는 맏언니처럼 두 동생을 잘 돌봐주고, 유미와 유진은 하나를 친언니처럼 생각하게 된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집’이 가장 큰 주제다. 유미가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린다. “우리 집은 진짜 왜 이러지?” 유미의 이야기를 들은 하나가 대꾸한다. “우리집도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다른 집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는데 우리집은 왜 이럴까?’ 요즘은 이런 고민이 SNS로 번졌다. ‘SNS 속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걸까?’.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바꿔 말하면, 행복에는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불행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사연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내가 불행한 이유는 나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호하게 우아해 보이고, 나는 구체적으로 꾸질꾸질하다. 우리는 행복한 서로를 부러워하고, 불행한 자신을 괴로워하는, 닮은 사람들이다.
하나가 보기에 유미와 유진은 불행할 이유가 없다. 엄마 아빠 사이가 좋으니까. 전화 통화를 해도 웃음이 가시질 않고, 집 벽에는 행복한 한때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유미와 유진이 보기에도 하나는 불행할 이유가 없다.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니까.
유미가 하나의 집을 부러워하자, 하나는 자신의 집이 좋지 않은 이유를 열거하기 시작한다. “음……, 우리집에는 장난감도 별로 많이 없고, 너네 집에 있는 마당도 없고, 토마토 화분도 없고, 꽃도 없고, 그리고 또…….” 영화를 보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지만, 당사자로서 그런 객관성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미와 유진은 도배 일을 하러 다른 지역에 간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면서 ‘상자 집’을 만든다. 유미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구박에도 꿋꿋하게 재활용 더미에서 상자를 모은다. 굴러다니는 계란판과 상자들을 주워 모아 집을 만든다. 상자 집은 내 집이 없어서 계속 이사를 다녀야 하는 네 식구를 위한 선물인 셈이다.
하나 역시 상자를 좋아한다. 자신의 소중한 물건들을 침대 밑 상자에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심지어 아빠의 휴대전화기까지 상자에 보관한다.(자세한 이유가 궁금하면 영화를 보세요!)
생각해보니 나 역시 상자에 집착한 적이 있었다. 내 공간이 없는 아이였고, 나만의 것을 담아둘 서랍장이 없는 아이였다. 아버지의 속옷 상자든 어머니의 화장품 상자든 내 것을 담아둘 수만 있으면 괜찮았다. 여러 개의 상자를 내 것으로 소유하고, 상자에 담을 것들을 분류하고, 상자를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만의 방이 생기기 전까지는 작은 상자가 내 방이었다. 거기에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내가 들어 있었다.
상자 같은 집에서 산 적도 있다. 대학 시절, 고향을 떠나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을 구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상자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가로 세로 3미터 정도 되는 좁은 자취방이었고 낮은 책상, 만능 쿠커, 3단 책장이 세간살이의 전부였다. 겨울에는 연탄을 가는 게 귀찮아서 이불을 둘둘 만 채 잤고, 여름에는 끔찍한 더위에 시달리면서도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게 행복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스웨덴의 한 호텔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딱 하루만 잘 곳을 해결하면 되는 상황에서 가장 싼 호텔을 골랐는데, 나의 첫 번째 자취방과 무척 닮은 곳이었다. 창문이 없었고, 크기도 딱 그 정도였다. 냉장고와 책상, 침대, 옷장이 있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20여 년 전을 떠올렸다. 20여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상자에서 상자로 이동한 것 같다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결국 하나의 상자라는 생각이 든다. 상자의 크기야 모두 다르겠지만, 모든 상자에는 비밀이 있고, 추억이 있고, 사연이 있다. 상자와 상자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상자를 닮은 집에 들어가서 산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우린 상자들이다. 가끔 뚜껑을 열어서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 서로를 알 수 없다.
하나와 유미와 유진이 상자를 쌓아올려 만든 집은,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크기가 서로 다른 상자들을 레고 블록 맞추듯 이리저리 돌려가며 쌓아올렸다. 아귀가 맞지 않는 상자들을 어떻게든 쌓아올리고, 빈틈을 또 다른 상자로 메운 집이 탄생했다. 종이 상자로 만든 집은 언뜻 봐도 위태롭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아이들한테는 그 집이 소중하기만 하다.
유미, 유진의 부모님을 찾으러 떠난 세 아이는 우연히 빈 텐트에 들어가서 잠을 청하게 된다. 유미는 텐트에 누워 신나게 이야기한다. “여기가 우리집이면 좋겠다.” 하나가 호기롭게 대꾸한다. “그냥 우리집 할까?” 텐트는 커다란 상자나 마찬가지다. 세 명이서 포근하게 누울 수 있는 상자, 억지로 짜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상자, 지붕이 벽을 대신하고 있는 상자,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떨어지던 낙엽이 자신의 몸을 비비는 상자.
책에서 물거미의 집을 본 적이 있다. 물거미는 물속에 집을 만들어서 생활한다. 수초 사이에다 거미줄을 치고, 엉덩이를 물 밖으로 내민 다음 공기를 넣어 기포를 만든다. 기포를 여러 번 반복해서 만든 다음 합치면 집이 된다. 물거미는 공기 집에서 먹이도 먹고, 알도 낳는다. 집을 만들고 거기에서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단순한 일이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를 보고 나면 집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집의 본질이 상자라면, 우리는 왜 그렇게 크기에 집착해야 하는 것일까. 집의 본질이 관계라면, 우리는 왜 그렇게 집이 있는 장소와 가격에 목을 매는 걸까. 집의 본질이 휴식이라면 우리는 왜 그렇게 집에서 보이는 ‘뷰(view)’에 목말라하는 것일까. 집이란 지붕과 벽과 바닥으로 이뤄진 건축물일까, 아니면 그 안에 있는 공간일까. 집은 출발하는 곳일까, 도착하는 곳일까. 가족이란 우연히 만난 운명일까, 아니면 운명적으로 만난 타인일까. 가족은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싶은 사람일까, 밥을 먹기 위해 집만 공유하는 사람일까.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나와 유미가 ‘이제부터 텐트가 우리집’이라고 신나서 이야기할 때, 막내 유진이 천진하게 묻는다. “언니, 근데 우리 뭐 먹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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