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고 복이 많을 것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 찬실은 예상과 달리 여러모로 복이 거덜난 상태이다. 오랫동안 함께 작업하던 영화 감독이 술자리에서 갑자기 죽어버리는 바람에 영화 프로듀서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게 됐다. 일종의 재난 상황이 닥친 것이다. 남자도 거들떠보지 않고 계속 일했고, 평생 영화만 만들 수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의 ‘일복’을 행복하게만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영화사 대표는 이런 말로 폐부를 찌른다.
“그러니까 누가 주구장창 그 감독하고만 일하래? 그런 영화에 피디가 뭐가 중요해?”
자신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셈이다. ‘그런 영화에 피디가 뭐가 중요해?’라는 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 우린 저 말의 다른 버전을 수없이 들어왔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너 하나 빠져도 아무도 몰라.”
“네가 죽는다고 해도 세상은 하나도 안 변해.”
“너 같은 거 신경이나 쓰는 줄 알아?”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우리가 알던 세상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허물어져 내린다. 내가 속한 아주 작은 세계에서는 그래도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미미하게나마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의 착각이란 걸 깨닫는 순간 우린 기댈 데가 없어진다.
찬실의 운명은 새롭게 시작된다.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그러니까 비교적 값이 싼 동네-으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전에 알던 사람들은 찬실을 불쌍하다고 여기지만, “아, 그 피디님 참 복도 없지.” “언니, 이렇게 살지 말고, 남자라도 만나.”라며 동정을 받지만, 새롭게 만난 집주인 할머니는 찬실의 좌절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젊은데 뭐가 걱정이냐는 투다. 찬실은 자신의 직업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 전엔 뭐 했어?”
“피디요.”
“뭐?”
“영화 만드는 피디요.”
“그게 뭐 하는 건데?”
“돈도 관리하고, 사람들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하는 사람인데요.”
“그니까, 그게 뭐 하는 사람이냐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얼마나 이상한 일을 했으면 하는 사람도 몰라. 됐어. 내가 다 알아들은 걸로 칠게.”
할머니는 ‘알아들은 걸로 친’ 후에 찬실에게 백숙을 먹인다. 한글을 가르쳐달라고 하고, 화분을 함께 옮기고, 콩나물을 함께 다듬는다. 서서히 찬실의 삶에 스며든다.
때로는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보다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위로가 될 때가 있다. 나에 대해 너무 속속들이 다 아는 사람에겐 기대기 힘들다. 내가 왜 아픈지 너무 잘 아는 사람들에겐 상처를 보여주기가 무섭다. 그냥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필요할 뿐인데, 너무 많은 동정과 위로와 격려와 안부가 쏟아질까 봐 두렵다. 나와 친한 사람들 앞에서 내가 너무 초라해질까 봐, 내가 너무 작아질까 봐. 찬실은 할머니에게 은근 슬쩍 마음을 기댄다.
찬실은 할머니에게서 인생을 배운다. 할머니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찬실이 배우는 것이다. 할머니는 찬실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가르칠 수도 없다. 찬실의 부족한 점을 할머니는 모른다. 할머니는 오히려 무능력하다. 한글도 모르고, 나이도 많이 들었고, 삶에 대한 의욕도 없다. 귀신 만나면 자기나 빨리 데려가라고 하소연하고, 나이 드니까 하고 싶은 게 없어져서 ‘오히려’ 좋다고 한다. 찬실은 그런 마음이 가능하냐고, 진짜로 하고 싶은 게 없냐고 묻는다. “할머니,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할머니가 콩나물을 다듬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지나치게 선문답 같은 말이고,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부르짖던 처절한 대사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난 오늘만 산다.”의 할머니 버전 같기도 하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수백 수천 번 들었던 어른의 충고 같기도 한 말이지만, 나는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할머니의 인생 전부를 본 것 같았다. 할머니는 수많은 내일을 기다리면서 살았을 것이다. 어제를 딛고 오늘을 견디며 내일을 바랐을 것이다. 나이가 든 할머니는 이제 어쩌면 더이상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일 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몰랐던 한글을 배우려고 하는 건, 분명히 미래를 위한 일이지만, 그런 미래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오늘을 ‘애써서’ 사는 것이다.
찬실에게 갑자기 귀신 장국영이 나타난다. 어릴 때 좋아했던 홍콩 배우가 ‘난닝구’차림의 짝퉁 한국 귀신 버전으로 나타난다. 귀신은 귀신인데, 무섭지 않고 귀엽고 엉뚱하다. 찬실 앞에 자꾸만 나타나서 계속 같은 말을 한다. “찬실 씨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진짜 깊이깊이 생각을 해봐야 해요.” 상황은 웃기지만, 내용은 진지하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커다란 장점은, 쓰디쓴 상황을 웃음에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릴 정도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웃을 수 있을까? 억지로라도 웃으려고 힘을 낼 수 있을까? 찬실이는 기어코 웃는다. 환하게 웃으면서 후배들이 가는 길에 플래시 불빛을 비춰준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야 우리는 깨닫는다. 찬실이가 복이 많은 이유는,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부의 마음 때문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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