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 푸네스가 주인공이다. 그의 기억력은 기적에 가깝다. 평범한 인간들이 탁자 위의 유리컵을 지각하는 동안, 푸네스는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모든 잎사귀들과 가지들과 포도알들의 수를 지각한다. 푸네스는 1882년 4월 30일 새벽 남쪽 하늘에 떠 있던 구름들의 형태를 기억한다. 물결들의 모양을 기억하고, 꿈을 복원할 수 있으며, 하루를 통째로 되돌이켜 기억할 수 있다. 이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기억력에 자신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 때문이다. 클라우드 서비스란 인터넷으로 연결된 초대형 고성능 컴퓨터에 콘텐츠를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서비스다. ‘구름(Cloud)’이라는 형체 없는 곳에다 데이터를 저장해두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료뿐 아니라 기억도 클라우드 서비스에 맡기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언제나 들고 다니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검색하면 그만이다. ‘아, 그 제품 이름이 뭐였더라?’, ‘아, 그 배우 이름이 뭐였더라’ 쉽게 검색할 수 있으니 어렵게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전화번호도, 일하면서 만난 사람의 이름도, 주소나 찾아가는 길도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기억하려는 의지가 줄어드니까 기억력 자체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것은 테크놀로지 발전에 따른 축복일까, 저주일까.
푸네스는 자신의 기억을 ‘쓰레기 하치장’에 비유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혼자서 가지고 있는 기억이 세계가 생긴 이래 모든 사람들이 가졌을 법한 기억보다 많을 거예요.” 푸네스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슬퍼졌다. 기억한다는 것은 축복보다 저주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됐다. 억지로 기억하려 해도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잊게 마련이다. 이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우리가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면 ‘쓰레기 하치장’에서처럼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뭘 잊어버릴지 선택하는 것도 기억의 한 종류다. 푸네스에 대한 이야기를 쓴 보르헤스도 이렇게 말했다.
“난 상상력이 기억과 망각 속에서 생겨난다고 봐요. 이 두 가지를 섞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죠. 사람들은 기억도 해야 하고 잊기도 해야 해요. 모든 걸 기억해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내 작품에 나오는 푸네스처럼 모든 것을 끝없이 기억하면 미쳐 버릴 것이기 때문이에요. 물론 우리가 모든 걸 잊는다면, 우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거예요. 우린 우리 과거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거예요. 우린 이 두 가지 요소가 뒤섞인 상태를 지향해야 해요. 안 그래요? 이 기억과 망각을 우린 상상력이라 하지요. 아주 거창한 이름이에요.”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어떤 것을 기억하려 애쓸 수 있다.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매일 반복하고, 갖은 수를 다 쓰면 끝내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잊는 건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 같지만, 어떤 기억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불시에 노크도 없이 뇌를 찾아온다. 인간의 기억이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기억’과 ‘절대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영화 <더 파더>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 안소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알츠하이머를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환자가 겪는 고통을 주변에서 관찰한다. 환자의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주변 사람들이 겪게 되는 슬픔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많다. 대체 머릿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으니까. 과거의 사소한 일들은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왜 어제 본 사람은 몰라보는 것일까? 어째서 몇 개의 기억만 또렷하게 남는 것일까?
<더 파더>는 시점을 뒤집는 모험을 감행한다. 영화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1인칭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안소니의 당황스러운 눈빛이 영화의 핵심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알츠하이머 병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이 매순간 얼마나 복잡한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지는지, 기억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 같은 것인지, 조금은 체험할 수 있다. 안소니 홉킨스는 이 영화로 제93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기억을 잃어가는 안소니의 상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무엇이 사실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어마어마한 연기였다.
안소니가 기억하고 있는, 체감하고 있는 현실은, 진짜가 아니다. 그는 과거의 어떤 경험을 절대 잊지 못하고, 과거에 살고 있다. 몸은 현재에 있지만 머리는 과거와 현재를 계속 오가고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타임머신이 내장돼 있어서 수시로 과거의 여러 시점들을 오갈 수 있다. 안소니가 우리와 다른 점은 그 과거를 현재로 믿는다는 것이다.
안소니가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있다. 길거리에서 아이가 비닐봉지를 가지고 놀고 있다. 가방을 바닥에 던져 두고 분홍색 비닐봉지를 계속 하늘로 튕겨 올리는 놀이를 하고 있다. 아이는 무조건 현재를 산다. 놀이에 집중하고, 내일은 절대 오지 않는다는 듯, 비밀봉지가 바닥에 떨어지면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하듯 놀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안소니는 현재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본다. 아이처럼 안소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안소니는 시계에 집착하고 계속 시간을 물어본다. 아무도 훔쳐가지 못하게 자신의 시계를 감추고, 상대방의 시계가 내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손목 위의 시계가 사라지자 혼잣말을 한다. “시간도 모르고 살게 생겼어.” 시간이란 순간이 아니라 관계다. 6시만 혼자 존재할 수 없다. 6시란 5시 이후에 오며 7시 이전에 있어야 한다.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 를로르가 쓴 <꾸베 씨의 시간 여행>에서는 노인이 이런 말을 한다.
“음악은 시간에 관한 아주 훌륭한 생각들을 제공해준다네. 어떤 음이 자네를 감동시키는 건 오직 자네가 그 이전의 음을 기억하고 그 다음의 음을 기다리기 때문일세……. 각자의 음은 어느 정도의 과거와 미래에 둘러싸여 있을 때만 그 의미를 가진다네.”
삶의 어느 한순간이 행복지기 위해서는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을 살아내야만 이후에 오는 행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알츠하이머란 시간에 갇히는 병인 것 같다. 삶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병이다. 안소니는 계속 시간을 묻는다. “지금이 몇시지?” 그런데 날짜는 묻지 않는다. 안소니의 뇌 속에서는 24시간이 쳇바퀴 돌 듯 계속 회전하고 있다. 24시간 속에 어린 시절도 들어 있고, 가슴 아픈 기억도 들어 있고, 어제도 들어 있고, 오늘도 들어 있다. 안소니는 수많은 기억의 시간 속에 유폐되어 버린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다시 익숙한 24시간이 반복된다. 그건 어쩌면 자신이 살아왔던 전 생애를 등에 짊어지고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안소니는 마지막에 이렇게 외친다.
“여기서 나갈래. 누가 날 좀 데려가줘.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자신이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에 갇히는 것, 이것은 분명한 저주일 것이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두어야 한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억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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