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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by 김중혁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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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1인칭으로 살아간다. 타인의 고통을,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다. 겨우 짐작할 뿐이다. 짐작이라도 해보려는 시도 덕분에 우리는 간신히 연결되어 살아간다. ‘짐작(斟酌)’이라는 한자어는 술과 관련돼 있다. 속이 보이지 않는 술병으로 술을 따를 때, 우리는 그 양을 가늠하기 힘들다. ‘짐(斟)’은 ‘술 따르다’는 의미지만 ‘머뭇거리다’라는 뜻도 된다. 술병을 많이 기울이면 술이 왈칵 쏟아지고, 술병을 완만하게 기울이면 술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머뭇거리면서, 술병을 조금씩 기울여가면서, 타인의 마음에 든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 어림잡아 가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알고 지냈다’는 것은 정확히 어떤 뜻일까. 그 사람의 취향이나 생김새의 변화는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의 방향에 대해서도 알기 어렵다. 태어나자마자 같은 공간에 던져진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형제 자매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몹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전에 쌍둥이로 태어난 미술가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는 쌍둥이를 만난 게 처음이라서 궁금한 게 무척 많았다. 좋은 점은 무엇인지, 싫은 점은 무엇인지, 장점이나 단점,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부담감, 취향이나 특기의 차이……,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외모가 똑같은 사람은 있어도 마음이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쌍둥이라고 해서 외모가 똑같지는 않지만 구별하기 쉽지 않은 쌍둥이도 많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미술가는 “똑같다는 말 때문에 남들과 다르려고 노력한 적도 많아요. 동생은 활달한데, 저는 조용히 앉아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자라면서 갈림길에 설 때마다 조금씩 어긋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죠.”라고 했다. 어떤 심정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며 누군가와 헤어진다.

노아 바움백은 1인칭의 삶을 가장 잘 다루는 감독이다. <오징어와 고래>, <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위 아 영>, <결혼 이야기> 등 수많은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하나만 말하라면, ‘도시에서 사는 1인칭의 삶, 그리고 1인분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가족이나 연인에게 상처받으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외로운 상태에 빠지며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많은 사람들이 2019년작 <결혼 이야기>를 노아 바움백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스칼렛 조핸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극찬받았고, 베니스영화제에서도 황금사자상 경쟁 후보였다. <결혼 이야기>가 부부의 이혼을 통해 가족을 바라봤다면, 제목을 외우기도 힘든 2017년작 <마이어로위츠 이야기(제대로 고른 신작)>은 아버지에게 고통받는 삼남매의 이야기다. <결혼 이야기>에 비하면 조금 기괴하고 엉뚱하지만, 1인칭의 삶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더스틴 호프만, 엠마 톰슨, 벤 스틸러, 아담 샌들러……, 배우들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떨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차를 하기 위해 아버지와 딸이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둘의 대화가 기묘하다. 대화를 하는 것 같지만, 두 사람은 서로 각자의 이야기만 한다. 아빠는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해서 화를 내고, 딸은 채식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딸이 사진 작가 ‘신디 셔먼’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아빠는 “이미 2년 전에 내가 추천했는데 네가 귓등으로 들었다”고 말한다. 아빠가 다른 차에게 욕설을 해대자 딸이 소리를 지른다. “아빠, 차에서 악쓰지 말아요. 저 사람은 어차피 못 듣고, 내 귀만 아파요.” 아빠와 딸의 도입부 장면은 가족의 의미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 밖에서 힘든 일을 겪은 다음, 집 안에서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한다. 자신의 편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화풀이를 하지만 듣는 사람은 진심으로 공감하긴 힘들다.

살을 부대끼고 사는 가족조차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면, 아니, 오히려 너무 가까운 관계 때문에 공감이 힘든 게 가족이라면, 우리는 가족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할까. <마이어로위츠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이다.

해롤드 마이어로위츠(더스틴 호프만)는 한때 ‘조금’ 잘나가던 조각가. 그에게는 큰 아들 ‘대니(아담 샌들러)’, 둘째 ‘진(엘리자베스 마벨)’, 셋째 ‘매튜(벤 스틸러)’ 등 세 명의 자식이 있는데, 두 번의 이혼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조금 복잡하다. 대니와 진은 첫 번째 결혼의 결과이고, 매튜는 두 번째 결혼의 결과이고, 현재 해롤드는 세 번째 결혼을 해서 ‘모린(엠마 톰슨)’과 둘이서 살고 있다. 서로 다른 세 명의 자식들에게는 공통된 마음이 하나 있는데, ‘아버지가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해롤드는 자신밖에 모르는 인물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으며, 한때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자신의 과거에 묶여 살아가고, 잘나가는 동료 작가를 시기하고, 세상의 모든 일들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해롤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에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이다. 오랜만에 만난 셋째 매튜와 식당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면 해롤드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괄호 속의 내용은 그의 속마음을 추측해본 것이다.

해롤드 : 청동 작품을 전시할까 해. 그거 만들 적에 넌 내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지. 기억나니? (내가 잘나가는 작가였을 때, 다정한 아빠이기도 했지. 그렇지 않니?)

매튜 : 전에도 얘기해주셨는데 기억 안 나요. (몇 번을 말하세요? 기억 안 난다니까요. 저한테 얘기했다는 건 잊어버렸죠?)

해롤드 : 원래는 ‘무제’였는데 ‘매튜’라는 이름으로 하려고 해. (네 이름이 들어간 작품이라니, 멋지지?)

매튜 : 대니의 딸 일라이자도 보고 싶네요. 자기 영화를 보내줬는데 잘 만들었더라고요, 봤어요? (손녀가 멋진 예술가인 거 알아요?)

해롤드 : 그땐, 나는 네가 조소에 관심을 가질 줄 알았어. (아직 내 얘기 안 끝났다.) 나는 네가 예술가가 될 줄 알았어.

매튜 : 예술가랑 일해봐서 성질 더러운 거 알아요. (아빠 성질 더러운 거 잘 모르죠?) 저 동료들과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어요.

해롤드 : 모린이 내 전시회에 누굴 부른대. (몰라, 됐고, 난 그냥 내 얘기 할 거야.)

우리 모두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딴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자주 하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다. 얼굴을 보며 앉아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몇만 광년 떨어진 행성들일지도 모른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건을 경험한다고 해서 마음의 작동이 같을 리 없다. 가족도 그렇다. 대니는 아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끔은 아빠가 용서받지 못할 끔찍한 일을 한 가지 저질러서 딱 그것만 원망하며 살고 싶어. 그런데 그런 게 없고 매일 자잘한 일만 있지. 찔끔찔끔.”  큰 상처 대신 자잘한 상처가 쌓이는 곳이 집이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가까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각자 최대한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면서 했던 대니의 마지막 혼잣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사랑해요. 용서할게요. 용서해주세요. 고마워요. 굿바이.”

속마음을 해석하자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그동안 좋은 일도 많았죠. 그러니 그 모든 시간을 사랑해요. 때로 나한테 했던 나쁜 짓들을 용서할게요. 내가 했던 나쁜 짓도 용서해 주세요. 정말 고마운 일도 많았어요. 그렇지만 이제 각자의 길로 가요. 서로 행복해진 뒤에 다시 만나자고요. 굿바이.”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제대로 고른 신작)
마이어로위츠 집안의 세 남매가 연로한 조각가 아버지의 회고전을 준비하기 위해 재회한다. 오랜 세월동안 뿌리내린 가족의 갈등은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하는 지금 풀릴 수 있을 것인가?
평점
6.7 (2017.01.01 개봉)
감독
노아 바움백
출연
아담 샌들러, 엠마 톰슨, 벤 스틸러, 더스틴 호프만, 엘리자베스 마블, 캔디스 버겐, 대니 플래허티, 레베카 밀러, 자레드 샌들러, 아담 데이빗 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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