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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라는 도구/밑줄 긋는 낮과 밤

루시아 벌린의 첫 인상

by 김중혁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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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많은 연예인들이 지금은 친해진 동료들의 첫인상에 대해 말할 때가 있다. 

 

“첫인상은 참 별로였어요.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았죠.” 

“엄청 새침 떠는 애로 생각했죠. 그런데 말을 나눠보니까…….” 

“아,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는구나, 흥, 나도 뭐 관심 없다고…….” 

 

첫인상이 좋았다는 건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예능에는 반전이 있어야 하니까,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알고보니 속 깊은 사람, 무섭게 생겼지만 다정한 사람, 이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으니까.

첫인상이 실제와 달랐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의 첫인상이 쉽게 깨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편견은 힘이 세다. 첫인상이란 수많은 조건들 중에 어떤 요소로 우연히 결정되는 거지만 우리는 우리의 첫인상을 무한 신뢰한다. 나는 ‘사람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촉이 좋은 사람’이어야 하니까.

첫인상이 좋으면 우리는 좋은 면만 보기 시작한다. 첫인상이 맞다는 가짜 증거를 계속 생산해내는 것이다. 뛰어난 사기꾼들은 바로 그 지점을 노린다. 첫인상만 좋게 각인시키면 무한한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아낌 없는 투자를 끌어올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떤 첫인상으로 남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오해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원래 그렇지 않은 사람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면이 있다’고 생각하길 원한다. 도대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편견 없이 본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걸까?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을 편견 없이 보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도대체 사람들의 속마음은 어떤지, 무슨 생각을 그토록 골똘하게 하는지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열 길 물속의 풍경은 기술의 도움으로 또렷하게 보이지만, 한 길 사람의 속마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소설가들은 사람의 속마음 전문가들이다. 소설가들은 가장 추한 인간의 욕망부터 음험하고 비열한 밑바닥 감정까지, 저인망식 기법을 동원하여 샅샅이 끌어올린다.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거친 언어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가슴에 묻어두었던 마음들을 모두 꺼내 놓는다. 소설을 읽다가 흠칫 놀라게 되는 이유는 언젠가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해봤기 때문이며, 누굴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아 벌린만큼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잘 그리는 소설가도 드물다. 루시아 벌린은 ‘미국 서부의 탄광촌과 칠레에서 보낸 십 대 시절, 세 번의 실패한 결혼, 알코올 중독, 싱글맘으로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한 경험 등을 자신의 작품에 녹여낸’ 작가로 유명하다. 자신의 삶이 어두웠으니 또한 수많은 직업을 거치며 삶의 쓰린 맛을 지겹도록 느껴보았으니 그런 소설이 나온 게 당연할지 모른다. 루시아 벌린은 1960년대에는 눈부신 작품 활동을 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삶에 부대끼느라 소설을 거의 쓰지 못했다.

루시아 벌린의 단편소설 중 걸작이 많지만 <내 인생은 열린 책>(소설집 <<내 인생은 열린 책>>에 수록)만큼 가슴 아픈 소설이 없다. 주인공 클레어 벨라미는 “아이를 넷 거느린 이혼녀로 나이는 기껏해야 서른 정도”로 보이는, 루시아 벌린의 분신 같다. 클레어 벨라미의 꿈은 단순했다.

“내가 코랄레스로 이사한 건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그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학생들을 가르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냥 좋은 선생님,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클레어 벨라미의 단순한 꿈은 쉽게 이뤄질 수 없다. 작고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은, 작기 때문에 소문이 돌기 쉬웠고, 평화롭기 때문에 자신들의 평화를 깨는 외부인에게 엄격하다. 클레어는 어느날 마이크 케이시라는 젊은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마이크 케이시는 클레어 벨라미의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야영을 하며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지만, 마을에 퍼진 소문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클레어가 불량 청소년 마이크 케이시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클레어가 좋은 사람과 사귀는 건 이해해 줄 수 있지만 마이크는 정신이 병적인 데다 나이는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다.’

이웃집 여자 제니 콜드웰이 소문의 진원지였다. 제니 콜드웰은 망원경으로 클레어 벨라미의 모든 삶을 관찰한다. 어떤 삶을 보내는지, 저녁 식탁에는 어떤 모습으로 앉는지, 함께 놀 때는 뭘 하고 노는지도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소설의 구성이 재미있다. 소설은 두 사람의 화자가 교대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망원경을 든 제니 콜드웰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편견으로 가득 찬 제니 콜드웰의 말만 들으면 클레어 벨라미가 잘못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열아홉 어린 남자와 관계를 맺고, 아이들은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뭔가 큰일을 낼 사람이 분명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 사람의 말에 동조하게 된다. 하지만 클레어 벨라미의 이야기까지 읽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쉽게 편견을 가지는지 알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아름답고, 마이크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즐거움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망원경을 들고 있다가 들킨 사람처럼 놀란다. 제니 콜드웰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우리는 늘 망원경을 들고 멀리서 상대방을 관찰한다.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고, 착각하고, 평가 내리고, 편견 가득한 눈으로 재단한 다음, 뒷이야기를 퍼뜨린다. 망원경이란 멀리 있는 것을 자세하게 볼 수 있게 해줄 뿐, 그 사람의 음성이나 생각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쉽게 첫인상을 정하고 그걸 수정하는 일은 게을리 한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말로 가득한 댓글들을 보면, 쉽게 기사를 내보내고 정정은 하지 않는 몇몇 언론들의 행태를 보면, 세상에는 망원경을 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주인공 클레어 벨라미는 편견의 희생양이 되어 마을을 떠난다. 그럼에도 나는 슬픈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대목 때문이다.

“케이시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세상 사람들이 편견 가득한 눈초리로 단죄한다고 해도,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도,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한 사람만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 있다. 그 한 사람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교류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소설을 읽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내 인생은 열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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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루시아 벌린
출판
웅진지식하우스
출판일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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