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또래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치환의 시 <깃발>을 안다. 시험에도 나왔던 것 같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나 빨랫줄에 걸린 옷들을 볼 때마다 유치환의 시가 떠오른다. 동시에 국어 선생님의 해설도 떠오른다. “자, 여기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어떤 표현이죠? 아우성이 뭐예요? 여러분들처럼 떠들썩하게 기세를 올리면서 지르는 시끄러운 소리잖아요. 그런데 아우성이 소리가 없다는 게 말이 돼요, 안 돼요? 말이 안 되는 건 뭐다? 역설적인 표현이다. 모순이죠, 모순.” 노트에 그렇게 받아 적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역설적인 표현’.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면서 나는 늘 소리를 본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소리가 보인다. 어떤 소리는 들릴 뿐 아니라 보이고, 어떤 형상은 보일 뿐 아니라 들리기도 한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표현을 ‘역설적 표현’의 대표 주자로 외웠지만, 이제는 그 표현이 역설이 아니란 걸 안다. 우리는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을 자주 만난다. 괴로운데 자꾸 웃음이 난다든지, 행복한데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느낀다든지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국어 선생님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고독이란 게 뭐죠? 선생님 고독한데 아무도 대꾸 안 할 거예요? 외롭고 쓸쓸한 거, 그게 고독인데, 시끄럽다는 게 말이 될까요, 안 될까요? 시끄러우면 고독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게다가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럽대. 이런 표현은 뭐다? 역설이다.”
말로만 역설이라고 외웠지, 역설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살다보면 그런 모순과 역설의 순간이 너무나 많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순간들이 너무나 많다. 이제 나는 그때의 국어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아졌고, 역설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군중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와중에, 모두 함께 즐기는 시간 사이에, 우리는 자주 고독하다.
소설 속 주인공인 ‘한탸’는 삼십오 년간 폐지 압축공으로 일해온 사람이다. 어두운 지하실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폐지를 압축한다. 그는 폐지를 압축하면서 글자에 매혹된다. 폐지 속에 담긴 지식을 머릿속에다 압축한다. 귀한 책들은 압축하지 않고 자신의 아파트에다 모아 둔다. 삼십오 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현대판 시시포스 이야기다.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옮기듯 매일 같은 노동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지루할 법도 한데 한탸는 자신의 압축기를 사랑한다. 은퇴를 앞둔 그는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한 압축기를 구입하려고 계획한다. 그 계획을 품게 된 데는 외삼촌의 영향이 컸다.
“사십 년을 철도원으로 일하며 건널목 차단기를 올리거나 내리며 선로 변경을 책임 졌던 사람, 사십 년 동안 나처럼 일이 유일한 기쁨이었던지라 은퇴한 후에도 그 일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사람이다. 외삼촌은 국경 지대의 한 폐쇄된 역에서 낡은 선로 변경 장치를 사들여 자기 집 정원에 설치했다.”
자신이 평생 했던 노동을 사랑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 아닐까.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은행원이 계산기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정비공이 드라이버를 사랑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키보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상담가가 헤드셋을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긋지긋해 하지 않고, 자신을 평생 도와준, 같은 길을 걸어온 도구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한탸는 압축기의 소음 속에서 삶을 배웠다. 압축기에다 한 권 한 권 책을 넣으며, 종이 위의 글자들이 바스러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배웠다. 압축기는 한탸의 스승이자 친구였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주인공 한탸를 작가의 분신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보후밀 흐라발은 프라하의 카렐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1939년 나치에 의해 대학이 폐쇄된 후, 거리에서 삶을 배웠다. 공증인, 서기, 창고업자, 전보 배달부, 전신 기사, 제강소 노동자, 철도원, 폐지 꾸리는 인부, 연극배우 등의 직업을 거쳤다.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으로 그의 책들이 금서가 되었지만 그는 끝까지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소설 내내 주인공 한탸는 독백 형태로 중얼거리는데, 그건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목소리처럼 들릴 때가 많다.
한탸가 언제나 자신의 일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선택권이 다시 주어진다고 해도 같은 일을 하겠지만 ‘석 달에 한 번쯤’ 자신의 직업에 혐오를 느꼈다.
“소장의 불평과 잔소리가 머릿속에서 윙윙대는가 하면 마치 확성기에 대고 악을 써대는 것처럼 귓속에서 맴돈다. 그렇게 내 지하실도 지옥이나 다름없는 불쾌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그는 어떻게 혐오에서 벗어날까? ‘중앙난방 제어실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보러 가는’ 즐거운 방법을 선택한다. 또 하수구 청소부들을 만나러 간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운을 낸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함께 있을 때 느끼는 행복과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충만감은 상호보완적이다. 고요하게 충만하며 영원하기까지 한 고독이 불가능하듯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서로 사랑하는 관계 역시 불가능하다. 우리는 함께일 때 다투고 고독을 그리워하지만, 혼자가 되고 나면 다시 화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한탸는 자신을 이렇게 규정한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란 아마도 생각들로 채워진 고독이란 의미일 것이다. 수많은 생각과 생각, 상념, 기억, 회한, 추억, 후회, 열망, 혼잣말, ‘이불킥’, 중얼거림 같은 것으로 가득 찬 머릿속은 얼마나 시끄러운가. 그런 고독 속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한탸는 영원과 무한을 이겨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한탸가 꿈꾸었던 돈키호테는 기사 소설에 심취해서 환상과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를 잊어버린 존재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읽은 소설 내용을 실천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 한탸와 반대로 살았던 사람이다. 돈키호테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는 온 세상을 하찮게 여겼으니, 세상은 그가 무서워 떨었노라. 그런 시절 그의 운명은 그가 미쳐 살다가 정신 들어 죽었음을 보증하노라.”
시끄러운 고독으로 가득했던 한탸의 삶을 읽고 나면,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라는 말을 듣고 나면, 이상하게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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