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멋진 문장을 모아두던 때가 있었다. “넌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누군가 물으면, “음, 유명한 예술가 누구누구는 이렇게 말했죠, 예술이란 말이죠…….” 이런 식으로 거장들의 대답을 인용하고 싶었다. 멋있어 보이고 싶었는데, 아무도 예술이 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20년 넘게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다보니, 예술에 대한 나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같은 말들. 어렸을 때는 이 말을 비웃었다. ‘인생, 겁나게 긴데, 무슨…….’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예술도 겁나게 짧은데, 무슨…….’으로 바뀌었다. 인생은 짧은 게 맞고 예술도 짧은 게 맞다. 광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예술이 길어봐야 얼마나 길까. 노래도, 그림도, 소설도, 유행도, 인생도 다 짧다.
또 예를 들면, “예술이 밥 먹여주냐?” 같은 말들. 주변의 어른들이 자주 했던 말인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밥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생각했다. 밥을 먹지 못해도 내가 원하는 예술을 하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예술이 밥도 잘 먹여준다. 그 어느 때보다 예술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방탄소년단이 한국의 대표 아이콘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속에서 하루를 마감한다. 예술에 대한 앤디 워홀의 말, “예술은 당신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Art is anything you can get away with.)”은 코로나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와닿는 문구다. 존 러스킨의 말도 있다. “예술이 없는 산업은 야만이다.” 조금 센 말 같지만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의 겉모습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의 목적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술가의 목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술가는 ‘사물의 내적인 의미를 해석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 쪽으로 기울고 있다. 우리 삶을 제대로만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저절로 드러날 것이고, 받아들이는 쪽에서 알아서 느낄 수 있다.
예술에 대한 경구 중 가장 좋아했던 것은 스티븐 킹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왔던 글이다. “우선, 이것부터 해결하자. 지금 여러분의 책상을 방 한구석에 붙여놓고, 글을 쓰려고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책상을 방 한복판에 놓지 않은 이유를 상기하도록 하자.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마지막 문장을 특히 좋아했다. 인생이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인생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예술가는 좋은 작품을 위해 인생을 모두 쏟아붓는다.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면 짧은 인생쯤 허비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삶을 살더라도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품 하나 남긴다면 괜찮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예술이 인생을 위해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우선 잘 사는 게 중요하고, 그 다음이 예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영혼을 모두 갈아넣어도 걸작이 나올까말까한데 그런 식으로 어중간하게 예술 해서 제대로 된 게 나올 리 있겠어?” 어려운 문제다. 잘 사는 것도 힘들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도 힘들다.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는가 하면, 죽는 순간 모든 작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길 원하기도 한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어디갔어, 버나뎃>을 보는 내내 그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삶이란 무엇이며 예술이란 무엇일까. 주인공 버나뎃은 최연소 ‘맥아더상’을 수상한 천재 건축가였으나 현재는 사회성 제로의 문제적 이웃이 된 사람이다. 워커홀릭 남편 ‘엘진’, 친구처럼 지내는 딸 ‘비’와 남극 여행을 준비하던 버나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국제 범죄에 휘말리게 되고, FBI 조사가 시작되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버나뎃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렇게 줄거리를 적고 나니 스릴 가득한 범죄물이나 첩보물 같아 보이지만, 실은 슬럼프를 겪고 있는 예술가 버나뎃의 고민을 담은 이야기에 가깝다. 물론 추격이 있고, 미스테리가 있고, 긴박한 사건들이 많지만, 슬럼프를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면 좋을 영화다.
잘나가던 버나뎃의 현재 상태는 몹시 불안하다.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만든 건축물이 다른 사람의 손에 덧없이 허물어지는 것도 봤고, 네 번의 유산을 겪었고, 인생 2막을 위해 이사간 도시 시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고, 이웃들은 예의 없는 행동을 계속 한다. 예민한 버나뎃은 창작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푸념만 늘어놓게 되고, 점점 심술 맞게 변해간다. 버나뎃의 유머와 에너지와 아름다움에 반했던 엘진은 쉴 새 없이 떠들고 늘 불평하는 버나뎃이 안타깝기만 하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영화를 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은 의외의 장면 때문이었다. 의외의 상황,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상의 대화인 줄 알았는데 예술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감독의 정체를 알고 나면 당연하다 싶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수많은 명대사로 유명한 ‘비포 시리즈(<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의 감독이다. 감독은 정말 대화 속에 우리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버나뎃은 수십 년 만에 건축계의 옛친구 폴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답답한 상황을 모두 털어놓는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어수선하고 두서 없게 어마어마한 양의 말을 빠른 속도로 뱉어낸다. 친구 폴은 불편한 기색 없이 버나뎃의 모든 말을 묵묵히 들어준다. 때론 함께 슬퍼하면서, 때로는 웃으면서 버나뎃의 이야기를 함께 겪는다. 이야기를 가로막지 않고 끝까지 다 들은 폴은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야기 다 한 거야? 듣기엔 재미있었지만 중요한 게 빠졌지. 너 같은 사람은 창작을 해야 해. 그러려고 세상에 태어난 거고.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위협이 되지.”
버나뎃은 충격을 받은 듯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한다. 그러자 폴이 이어서 말한다.
“다시 일 시작해. 뭐라도 만들란 말야.”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려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한다. 길고 장황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하더라도, 때로는 도무지 감정이입할 수 없는 생각을 늘어놓더라도, 끝까지 들어야 한다. 친구 폴이 그걸 해냈다.
말하는 방식이 몹시 불안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지닌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충격을 몸으로 견뎌낸 후에 빚어진 결과 때문일 가능성이 많다. ‘왜 이러는지’ 물어볼 게 아니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폴은 잘 들었을 뿐 아니라 정확한 충고도 했다. 어쩌면 버나뎃도 답을 알았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되돌아갈 힘은 없었다.
폴은 ‘너 같은 사람은 창작을 해야 해’라고 말했지만,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창작을 해야 한다. 우리는 작고 사소한 예술품을 매일 만드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가구의 위치를 옮겨보고, 커튼을 바꿔보고, 아름다운 요리를 하고, 마음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메시지의 문구를 계속 고쳐 쓰고, 인터넷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사진을 내가 원하는 프레임으로 잘라낸 다음 휴대전화의 바탕화면으로 저장한다. 이 모든 행동이 일종의 예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을 조금 바꿔 말하고 싶다. 예술의 의미는 창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 있다. 예술은 천재들만 하는 게 아니고, 삶과 병행해야 하는 것이며, 늘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태도가 진정한 예술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점점 변하고 있다. 우리 모두 폴의 말처럼 살아보면 어떨까. 뭐라도 만들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누군가의 위협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