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메리엄웹스터 영어 사전에 ‘stan’이라는 단어가 새로 추가됐다. ‘광적인 팬’ 혹은 ‘특정 유명 인사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행위 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미국 래퍼 ‘에미넴’이 2000년에 발표한 ‘Stan’이라는 노래에서 비롯된 단어다. 가사 속에서 스탠(Stan)은 에미넴에게 집착하는 광적인 팬의 이름이다. 시대를 반영한 노래가 새로운 단어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He stans hard for BTS.”라고 동사로 쓰면 “그는 방탄소년단의 광팬이다.”라는 뜻이 된다.
이런 사례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Mitty’다. ‘Mitt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몽상가, 자기를 대단한 영웅으로 꿈꾸는 소심자.”라는 뜻이 나온다. 1939년, 소설가 제임스 서버가 잡지 <더 뉴요커>를 통해 발표한 소설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의 주인공 이름이 보통 명사가 되었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와 소설의 내용은 많이 다르다. 소설은 아내의 백화점 쇼핑을 따라나선 월터 미티의 소소한 상상이 끝없이 이어진다. 기관총 소리가 들리는 전쟁터로 뛰어들었다가, 법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살인 용의자가 되었다가, 폭격기 조종사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무적의 월터 미티’로 변한다. 몽상 속에서는 누구보다도 거칠고 용감무쌍한 사나이지만, 현실에서는 아내가 미용실에 들어간 사이 강아지 비스킷을 사고 있는 처지다.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위축된 남자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속 벤 스틸러가 연기하는 월터 미티는 소심한 소시민에 가까운 인물이다. 잡지 <LIFE>에서 오랫동안 사진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뉴욕 밖으로 나가본 적도 거의 없고 해본 일도 많지 않은 심심한 사람이다. 유일한 취미는 ‘상상하기’다. 불타오르는 건물로 뛰어들어가서 짝사랑하는 여자의 강아지를 구해내고, 정리해고를 하러 온 상사와 대혈투를 벌이고, 히말라야 산맥으로 모험을 떠난다. 상상 속에서만. 그러던 어느날 <라이프>지의 폐간을 앞두고 전설의 사진 작가 ‘숀 오코널’이 보내 온 표지 사진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진을 찾지 못할 경우 직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월터는 모험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원작의 월터와 영화의 월터가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상상만 하던 원작 속 월터와 달리 영화 속 월터는 상상을 현실로 구체화시킨다. 소심함의 대명사 월터는 어떻게 모험을 떠날 수 있었을까? 당장 떠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월터는 모험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직장이 있고, 직장에는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어머니의 생활비도 감당해야 했다. 떠나야 할 이유보다 머물러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그러다 모든 상황이 일시에 바뀌었다. 직장은 문 닫을 예정이고, 16년 동안 수많은 사진을 다루면서 단 한번의 실수도 없었는데 마지막 표지를 장식해야 할 사진이 사라졌다. 경력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었다. 월터의 마음속에는 이런 의문이 생겨난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떠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묻는다. 잘 쓸 수 있는 방법은 알려줄 수 없지만 일단 쓰기 시작하는 비법은 알려줄 수 있다. “마감을 만들어라!” 마감에 돈이 걸려 있으면 더 좋다.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언제까지 글을 써주겠다는 약속을 해라. 그러면 일단 쓰게 된다. 그런데도 쓸 수 없다면, 마감이 다가오고 받은 돈을 ‘토해내야 할’ 위기에 처했는데도 써지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다. 글을 쓰고 싶지 않거나, 마감에 걸린 돈이 부족하거나.
많은 작가들이 비슷한 말을 한다. “글은 마감이 쓰는 것이다.” 내 생각도 비슷하다. 글은 마감과 함께 쓰는 것이다. 마감이 다가오면, 게다가 마감이 내일이면, 심지어 마감이 지난 상태라면, 무조건 글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일단 시작된 글은 언젠가 끝나게 돼 있다. 마감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가다 보면, 한 문장을 쓰고 다음 문장을 쓰고, 그렇게 계속 이어나가다 보면 글은 끝나게 돼 있다. 글이 안 끝나면 어떻게 되냐고? 마감을 우습게 보지 말길 바란다. 마감이 있으면 글은 끝나게 돼 있다.
월터가 모험을 떠나게 된 데는 월터의 직장 동료이자 월터가 짝사랑하고 있는 셰릴 멜호프의 역할이 컸다. 셰릴은 미스터리 소설 수업을 받고 있는데, 선생님의 말을 월터에게 전한다.
“거꾸로 가는 게 해결의 열쇠래요. 단서들 공통점을 찾아 역추적하는 거죠. 나름 과학적이에요. ……, 미스테리 소설반 선생님은 확실한 단서 하나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댔어요.”
미스테리 소설반 선생님의 말은 월터가 모험을 떠나는 동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글쓰기의 정수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식의 문장으로 바꿔볼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소재로부터 글쓰기를 출발해야 하고, 확실한 소재 하나를 붙들고 끈질기게 써나가다 보면 글은 저절로 풀릴 것이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1년치 계획을 세운다. 올해는 새로운 어떤 일에 도전하고, 지난해에 하지 못했던 어떤 일을 다시 해봐야지, 라는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세워본다. 살아보면 우리는 알게 된다. 1년은 무척 긴 시간이라는 사실을. 3월쯤이면 알게 된다. 올해도 망했다는 사실을. 6월쯤이면 알게 된다. 1년치의 계획이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마감 없이도 글을 잘 쓰는 쪽이겠지.
가끔 영화 <아저씨>의 대사를 떠올릴 때가 있다. “너희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나는 오늘만 산다. 그게 얼마나 X 같은 건지 내가 보여줄게.” 희망이 없는,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의 고충을 설명하는 대사지만, 나는 이 말을 “닥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허황된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사람보다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월터는 닥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무작정 떠나서 온갖 모험을 한다. 술 취한 조종사의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상어와 싸우고, 폭발하는 화산에서 도망치고, 히말라야를 오른다. 월터는 계획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장애물이 보이면 넘고 자전거가 있으면 집어 타고 산이 보이면 올라갔다. 떠나기 전 텅 비어 있던 그의 프로필은 모험으로 가득 차게 됐다. 월터는 <라이프>지를 떠나 새로운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입사지원서를 쓴다. 이런 지원서를 낸 사람에게 반하지 않을 회사가 있을까? “<라이프>지 필름 원화 관리자(숀 오코넬 담당), 해군 특전대는 아니지만 헬기에서 바다로 뛰어들었음. 하루 만에 17km 달리기, 자전거와 롱보드를 이용하여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경험하였음, 노샤크 최고봉 등정, 아이슬란드 어선 승선 (무보수 갑판 보조).” 우리는 자신만의 프로필을 채우기 위해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낯선 환경에 뛰어든다. 그렇지만 단지 미래의 안락함을 위해 프로필을 채우는 것이라면 금방 지칠 수밖에 없다. 월터가 다녔던 <라이프>지의 표어는 월터가 했던 모험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월터는 미래가 아닌 현재를 위해 모험을 선택했고, 모험의 결과로 세상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Mitty’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도 한번 바꿔보고 싶다. “몽상가, 자기를 대단한 영웅으로 꿈꾸는 소심자. 그렇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 우리 모두는 닥치면 모험에 뛰어들 수 있다.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말자.
- 평점
- 8.1 (2013.12.31 개봉)
- 감독
- 벤 스틸러
- 출연
- 벤 스틸러, 크리스튼 위그, 숀 펜, 셜리 맥클레인, 아담 스콧, 캐서린 한, 존 데일리, 테렌스 버니 하인스, 폴 피츠제랄드, 아드리안 마르티네즈, 마커스 안투리, 패튼 오스왈트, 게리 윌메스, 그레이스 렉스, 알렉스 앤팽거, 조이 슬로트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