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신작 <소울>은 사후세계를 다루고 있다. 재즈 뮤지션을 꿈꾸던 주인공 조 가드너는 밴드 오디션에 합격한 후 너무 기뻐서 뉴욕 거리를 뛰어다니다가 그만 맨홀 아래로 빠져버린다. 눈을 떠보니 사후세계. 이름도 무시무시한 ‘머나먼 저세상(Great Beyond)’이다. 깜짝 놀란 조 가드너는 무작정 도망을 가다가 이번에는 ‘머나먼 전 세상(Great Before)’에 도착한다. 태어나기 전의 영혼들이 자신의 성격을 형성해줄 ‘불꽃’을 찾는 곳이다. 조 가드너는 22번 영혼의 불꽃을 찾기 위해 함께 모험을 떠난다.
황당한 스토리 같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을 잘 살려, 설득력 있게 사후세계와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가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런 곳이 있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가장 큰 장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나 장소를 마음껏 형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데 있다. “실사로 찍는 게 더 어울리거나 인간 배우와 작업해서 더 좋은 영화가 될 이야기라면 하지 않는” 것이 픽사의 기준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꽃이 말을 하거나 기린이 윙크를 해도 그러려니 한다.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한계 없는 상상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장르이기 때문일 것이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수많은 걸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다. 대표작인 <토이 스토리>부터 기괴한 걸작 <몬스터 주식회사>, 귀엽고 감동적인 바닷속 이야기 <니모를 찾아서>, 슈퍼히어로들의 평범한 삶을 다룬 <인크레더블>, 한 사람의 기나긴 삶을 절묘하게 압축한 <업> 등 지금까지 스물세 편의 멋진 작품들을 발표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늘 “픽사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지?” 묻곤 했다. 스물세 편 중에서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지 알고 나면 취향을 조금 눈치채게 된다. 나부터 고백해야겠다. 우선 <토이 스토리> 시리즈는 빼야 한다. 토이 스토리를 고르는 건 반칙이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가 네 편인 이유도 있고, 워낙 유명하고 완벽한 작품이라 취향을 가늠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엔 두 작품이 막상막하로 경쟁하고 있다. <월-E>, 그리고 <인사이드 아웃>. 오늘은 <인사이드 아웃>으로 고르겠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최근작 <소울>과 <인사이드 아웃>은 비슷한 구석이 많다. 두 작품 모두 피트 닥터가 감독을 맡았다. <소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는 작품이라면, <인사이드 아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인격화한 작품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감독들이 자신의 아이들로부터 소재를 얻었다는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딸의 머릿속을 의인화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고, <소울>은 ‘아들을 지켜보면서 사람은 저마다 고유하고 구체적인 자아 의식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됐다. 쉬운 질문에서 창의적인 해답을 내놓은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울>을 좋아하지만 나에게는 <인사이드 아웃>의 소재가 훨씬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인사이드 아웃>은 인간을 움직이는 감정 컨트롤 타워에 다섯 가지 감정이 공존하고 있다고 설정한다. 감정을 인격체로 묘사했다. 기쁨, 슬픔, 분노, 혐오, 공포.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컨트롤 타워에는 이성과 감정이 힘겨루기를 하며 공존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감정이 주인공들이다. 하긴, 심사숙고하고 오랫동안 결정을 미루는 이성이 주인공이라면 영화 러닝타임은 다섯 시간을 넘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빠르게 표현되고, 행동으로 즉각 옮겨진다. 스토리로 만들기에는 이성보다 감정이 제격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기쁨, 슬픔, 분노, 혐오, 공포, 그리고 불안을 인간의 주요한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야릇한 감정, 어떤 하나의 감정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 아주 작지만 계속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미세한 감정들도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대여섯 가지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정을 타고나는 것일까, 학습하는 것일까?
찰스 다윈은 100년 전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각각의 언어와 풍습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어째서 같은 감정의 표정을 보이는 것일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건넬 때 엄지손가락을 세우지만, 호주에서는 가운뎃손가락을 곧추세우는 것만큼의 욕이다. 몸짓과 언어는 문화의 산물이다. 얼굴 표정 역시 문화의 산물이라면, 나라마다 대륙마다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이 달라야 할 것이다. 다윈의 관찰, 심리학자 폴 에크먼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인간의 표정은 타고나는 것이다. 자막이나 음성을 없애고 <인사이드 아웃>을 보더라도 우리는 캐릭터로 만들어진 감정을 정확히 판별해낼 수 있다. 딸의 머릿속이 궁금하다는 가장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인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의 세계를 그려낸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의 놀라운 점은 열한 살 소녀 라일리의 머릿속에 살고 있는 다섯 가지 주요한 감정을 캐릭터로 구현해낸 다음, 그들을 자연스럽게 섞은 것이다. 미네소타에 살던 라일리는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라일리의 혼란을 수많은 감정들의 조합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공포와 분노와 슬픔과 혐오가 커지는 머릿속에서 ‘기쁨이’는 뛰어다니며 상황을 수습하려고 한다. 기쁨이는 계속 ‘슬픔이’를 타이른다. 지금은 네가 나설 때가 아니라고,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지금은 라일리에게 기쁨만 선사할 때라고, 거듭 말한다. 기쁨이와 슬픔이가 기억 속 한 장면을 함께 보는 장면이 있다. 기쁨이는 이렇게 기억한다.
“하키팀이 다 모이고 엄마 아빠는 격려해주고……, 봐, 즐겁게 웃고 있어. 난 이때의 추억이 좋아.”
슬픔이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그날 라일리의 들개 팀이 플레이오프 전에서 졌지. 우승 골에 실패한 라일리는 하키를 관두려고 했어. 미안, 또 슬픈 얘길 했네.”
우리는 슬픔을 묻어두려고만 한다. 어떤 상황을 기억할 때도 슬픔보다는 기쁨 쪽을 선택하려고 한다. 슬픔은 슬픈 거니까, 눈물은 보이지 않는 게 좋으니까, 우울한 것보다는 쾌활한 게 좋으니까. 기쁨이와 슬픔이가 함께 보았던 장면의 진실은 ‘위로’였다. 우승골에 실패한 라일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엄마와 아빠가 안아주었고, 라일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하키팀이 모두 모인 것이었다. 기쁨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 아빠 그리고 하키팀이 그날 위로하러 와준 건 ‘슬픔이’ 때문이었어.”
만약 ‘기쁨이’가 ‘슬픔이’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사람들은 라일리를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승골에 실패했지만 담담하게 잘 버티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라일리는 몰래 울고, 혼자 괴로워하다 하키를 그만두고, 그날의 기억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슬픔이’가 밖으로 나와준 덕분에 함께 위로하는 기쁜 기억이 된 것이다.
기쁨과 슬픔은 분리된 감정이 맞지만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울다가 웃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두 개의 감정은 커다란 벽으로 가로막힌 게 아니라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볶음밥 속에 들어간 감자와 당근과 양파를 쉽게 골라낼 수 없는 것처럼 감정도 그렇게 뒤섞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슬퍼진다. 애써 슬퍼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또 힘을 내어 기뻐진다. 자연스럽게 기쁜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로 기쁨은 출발 에너지가 필요한 감정이다. 영화에서도 기쁨과 슬픔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슬퍼지고, 힘을 내서 서로를 돌봐야 기뻐진다면, 우리가 어느 쪽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는 자명해진다. 슬픔을 알아채고 긍정하려는 에너지가 기쁨의 싹에 영양분을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