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 채집 시기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하루 평균 네 시간만 일했다고 한다. 휴일 없이 일한다고 쳐도 주 28시간 근무다. 일을 마치고 와서는 동굴에서 멍 때리고 있거나 벽화 같은 걸 그렸겠지.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사냥을 하거나 먹을 걸 구하러 나갔을 것이다. 음식 창고가 가득 차거나 날씨가 궂으면 일을 건너 뛰기도 했을 것이다. 24시간 편의점이 없다는 건 좀 불편해 보이지만,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삶은 좀 부럽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에게도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겼던 시기가 딱 한 번 있었다.
군입대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며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외갓집에 ‘자진 농활’(내 의지로 뛰어 든 농사 활동)을 간 적이 있다. 일손이 부족한 추수철에 가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볼 요량이었다. 생각해보니 추수철에는 외갓집에 간 적이 없었다. 대부분 잔치나 명절 무렵에 들렀으니 농사일의 고단함을 알 길이 없었고 상상할 수 없었다. ‘시골은 참으로 고즈넉하고 한가하구나’, ‘닭이 방금 낳은 따끈따끈한 계란으로 만든 계란말이라니……’, ‘밭에서 막 따온 싱싱한 채소는 이다지도 싱싱하구나’ 같은 생각을 한 게 전부였다. 저녁을 먹고 누웠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외삼촌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새벽 4시였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장화를 신고 외삼촌을 따라나섰다. 그날 저녁, 내 오른팔에 감각이 없었고, 손바닥은 물집투성이었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점심은 뭘 먹었는지, 저녁은 또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허리를 숙이고 낫질하던 감각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전날과 달리 일찍 잠들었고, (아니 잠들었다기보다 기절에 가까웠고) 새벽 4시가 되어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정말 해가 뜨면 일하러 갔고, 해가 지면 잠을 잤다. 수렵 채집인들보다 근무 시간이 조금 더 길었던 것만 달랐다. 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일주일로 예정돼 있던 ‘자진 농활’을 3일 만에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삼촌과 외할머니는 서둘러 가는 나를 붙잡지 않았고, 웃으면서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넣어주셨다.
영화 <미나리>를 보는데 외갓집에서의 3일이 떠올랐다. 영화에 대해 오해할까봐 미리 얘기하자면, <미나리>는 농사일의 고충을 토로하는 영화는 아니다. 농사일이 힘들어 도망치는 이야기도 아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부부의 이야기다. 병아리 감별사 일과 농장 일을 병행하고 있는 엄마 ‘모니카(한예리)’와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 의젓한 큰딸 ‘앤(노엘 케이트 조)’, 몸이 아픈 아들 ‘데이빗(앨런 김)’, 한국에서 일을 도우러 온 할머니 ‘순자(윤여정)’ 등이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외할머니, 시골 마을, 병아리, 뱀, 미나리 밭, 농장 등의 요소들이 그 시절 외갓집을 떠올리게 했던 모양이다.
미국 이민사에서 병아리 감별이라는 직업은 큰 의미가 있다. 이민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병아리 감별 학원에 다녔고, 최대한 빨리 암놈과 수놈을 구분해 내는 능력을 키워야 했다. 병아리 감별은 상자에 있는 병아리를 잡고, 왼손으로 옮기고, 똥을 털어내고, 항문을 개장하여 암수를 확인하는 순서로 진행되는데, 대략 한 마리당 3초 이내에 모든 과정을 마쳐야 한다. 암놈이라면 상자에 옮겨 담고 수놈이라면 폐기용 통에 옮겨 담는다. 수놈은 다른 동물의 먹이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분쇄기에 갈아서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모니카와 제이콥은 커다란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을 테지만 병아리 감별사 일을 수년 동안 하면서 정신이 피폐해졌을 것이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어둑어둑한 공장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삐약거리는 병아리의 항문을 만지작거리고, 살 놈과 죽을 놈을 골라내는 일이 정신 건강에 좋을 리 없다. 제이콥은 아들 데이빗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놈은 맛이 없어. 알도 못 낳고 아무런 쓸모가 없어. 그러니까 너는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거야.”
아들에게 하는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병아리 감별 같은 쓸모 없는 일을 하는 대신 그는 채소를 키우기로 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거름을 준다. 누군가를 죽이는 감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채소를 살리는 일을 선택한다. 병아리 감별 공장과 채소 농장은 보기만해도 대비되는 공간이다.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산업화는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측정을 통해 일어났다.”고 했다. 증기 기관이나 방직 기계의 발명이 아니라 ‘초과해서 근무하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의 전환으로 산업화가 시작됐다는 뜻이다. 농사일은 밤에 할 수 없다. 사냥도 밤에 할 수 없다. 실내에서 기계를 작동시키는 순간,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됐고,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제이콥은 공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맡은 일을 빨리 끝내야 하는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장을 선택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이콥의 성공을 기원하게 된다. 이민 온 한국인들에게 맛 좋은 한국 채소를 공급하고 싶다는 그의 염원이 이뤄지길 바랐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인간이 됐을까. 더 많은 알을 생산하기 위해, 사료값을 아끼기 위해, 불필요해보이는 수놈을 분쇄기에 갈아버리는 사람들이 된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일까.
아들 데이빗은 건강하지 못하다. 심장이 온전치 못하다. 엄마와 아빠는 계속 데이빗에게 “뛰지 마라”고 한다. 외할머니는 그런 데이빗에게 다른 말을 해준다. “데이빗아, 데이빗아, 너는 아주 스트롱 보이야.”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누군가의 말 한 마디다. 우리 스스로가 약하다고 생각하고 못났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 건네는 “너는 강해, 너는 아름다워.”라는 말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그 말을 건네는 사람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영화의 제목을 <미나리>로 정한 것 역시 그런 의미일 것이다. 미나리는 흔히 볼 수 있는 채소다. 물만 가까이 있다면 쑥쑥 잘 자란다. 미나리를 알아보고 다가서는 순간, 미나리는 특유의 알싸한 향을 우리에게 내뿜게 될 것이다. 모든 존재가 특별한 곳에 쓰임새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다. 세상에 ‘쓸모 없는 잡초’란 풀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쓸모다. 영화 <미나리>를 보고 나오면서 ‘자연스러움’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해가 뜨고 지고,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계절이 바뀌고, 나무에 이파리가 돋아나는, 그렇게 모든 게 반복되지만 똑같은 게 하나도 없는, 무엇 하나 제자리가 아닌 게 없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