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 오면 신비로운 색의 변화에 탄성을 멈출 수 없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어두운 회색빛 속에서 연두의 기운이 드러날 때면 나도 모르게 특정 색깔을 응원하게 된다. “연두, 힘내라!” 소리 내어 응원하지 않아도 연두는 힘이 세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쑥쑥 솟아나 있고, 며칠 바쁘게 지내다 문득 살펴보면 나무며 땅이며 먼산에는 온통 연두 천지다. 연두는 서서히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봄은 순식간에 번지고 계절은 빨리 바뀐다.
올봄에는 꽃이 한꺼번에 피었다. 전문가들은 기후 변화 탓이라고 한다. 원래 겨울과 봄 사이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었다. 완전한 겨울 - 혹한의 기운이 조금 사라진 겨울 - 봄의 기운이 살짝 드러나는 겨울 - 봄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듯한 추위가 느껴지는 겨울 - 마못해 봄에게 한번 져주는 듯한 기운이 느껴지는 겨울 - 겨울과 봄의 기운이 팽팽한 시기 - 봄의 기운이 완연하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겨울 - 이제 진짜 봄이로구나 싶었는데 밤이면 여전히 겨울인가 싶은 시기 - 봄이 머지않았다 싶은 시기 - 완연한 봄. 겨울과 봄 사이에 이렇게 다양한 시기가 있기 때문에 꽃들 역시 단계적으로 피어나게 마련인데 올해는 딱 두 단계밖에 없었다. 겨울 - 봄. 어떤 사람은 봄이 아니라 여름으로 직행한 것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더워졌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특징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훗날 한국의 사계절을 화면 가득 담은 영화가 귀하게 대접 받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얘야, 저 때는 봄이라는 계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면서 꽃들은 만발하고 대지에서 향긋한 풀내음이 스며나오는 때라고 할 수 있지. 그래, 겨울과 여름의 중간지대 같은 거야.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한번 보렴. 거기에 잘 나와 있어.” 계절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영화가 바로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시험, 연애, 취업 등 무엇 하나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삶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김태리)은 오랜 친구인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을 만난다. 재하는 서울에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고, 은숙은 답답한 시골을 벗어나 서울에 가고 싶어한다. 자신만의 답을 찾고 싶어하는 여러 청춘의 삶이 계절과 함께 천천히 무르익어 간다.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은 김태리, 류준열, 진기주이지만 음식이기도 하다. 계절에 걸맞은 음식들이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입맛을 다시면서 영화를 보게 되고, 영화가 끝나면 뭐라도 하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싶어진다. 음식을 주요한 연결 고리로 삼아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길래 아예 음식에 초점을 맞춰 줄거리를 다시 써봤다.
“서울에서 편의점 도시락만 먹다가 배가 고파서 고향에 돌아온 혜원은 밤늦게 배춧국과 밥을 만들어 먹는다. 마지막 식량으로 얼큰한 수제비를 해먹은 다음, 고모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곶감도 얻어 온다. 친구들과 함께 시루떡, 막걸리, 장떡을 먹고 난 혜원은 엄마가 만들어준 오코노미야키의 추억을 떠올린다. 삐친 친구를 위해서는 크렘 브륄레를, 울고 싶은 친구에게는 매운 떡볶이를 만들어준다. 자신을 위해서는 양배추 샌드위치와 아카시아 꽃 튀김을 만들어준다. 봄에는 봄나물 파스타를, 여름에는 시원한 오이콩국을, 가을에는 밤조림을, 겨울에는 곶감을 먹으면서 혜원은, 자신만의 작은 숲을 완성한다.”
이쯤 되면 수많은 음식들이 혜원을 이용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속 많은 음식들이 일종의 은유와 상징 역할을 하고 있지만 혜원과 가장 닮은 식재료는 배추다. 팍팍하고 배고픈 서울 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날 밤, 고향집 냉장고와 찬장은 텅텅 비어 있다. 쌀 몇 줌이 식량의 전부다. 아빠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오래전에 자신의 꿈을 찾겠다면서 집을 나간 상태라 집에는 아무도 없다. 혜원은 꽁꽁 얼어 있는 밭에서 배추 한 포기를 잘라 온 다음 그걸로 배춧국을 끓였다.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배춧국은, 서울에서 꽁꽁 얼었던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집밥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국을 후루룩 마신 혜원은 바닥에 드러누워 까무룩 잠이 든다. 다음날 역시 배추 음식이다. 밀가루를 탈탈 털어서 수제비 반죽을 하고 눈을 치운 다음 수제비를 해 먹는다. 수제비와 곁들여 먹는 음식이 배추전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열 손가락에 배추전이 들어갈 것 같다. 설이면 어머니와 함께 만들어 먹던 음식이기도 하다. 배추전은 젓가락이 아닌 손가락으로 만든다. 뻣뻣한 배춧잎을 몇 번 툭툭 부러뜨린 다음 물에 갠 부침가루를 입혀서 기름에 지진다. 손가락으로 배춧잎을 꾹꾹 눌러주어야 골고루 익게 된다. 손가락에다 되직한 반죽을 묻힌 다음 빈곳에다 뚝뚝 떨어뜨리는 정성도 곁들여져야 한다.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눌러주고 채워주고 만져줘야 배추전이 완성된다.
처음에는 무슨 맛으로 배추전을 먹나 싶었다. 밍밍한 배추와 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번 맛을 들이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는 맛이 숨어 있다. 배추의 하얀 심 부분은 아삭아삭하고 푸른 이파리 부분은 쫀득하다. 처음에 밍밍하게 느껴지던 맛은 점점 고소해지고 반죽의 달큰한 맛과 기름의 끈적함까지 더해지면 굳이 간장에 찍지 않아도 딱 맞는 간이 된다.
혜원이 고향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온몸에 알려주는 음식이 배춧국과 배추전이라면,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살려내는 음식은 크렘 브륄레다. 자신이 ‘왕따’인 것 같다는 어린 혜원의 걱정에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널 괴롭히는 아이들이 제일 바라는 게 뭔지 알아? 네가 속상해 하는 거. 그러니까 네가 안 속상해하면 복수 성공.”
엄마는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는 대신 음식으로 위로해주었다. 크렘 브륄레는 프랑스어로 ‘불에 태운 크림’이라는 뜻이다. 이름에 레시피가 들어 있다. 크렘 브륄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저트로, 커스터드 크림을 그릇에 담은 뒤 설탕을 올리고 토치 램프로 표면을 태운다. 불에 태워 단단한 설탕막을 입히는 것이다. 티스푼으로 단단한 설탕막을 내려치면 속에 있던 하얗고 부드러운 크림이 드러난다.
엄마는 속상한 딸에게 왜 크렘 브륄레를 만들어주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달달한 디저트가 마음을 위로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믿지 못하겠지만, 달달한 디저트는 쓰디쓴 마음의 상처를 ‘진짜로’ 아물게 해준다. 근본적인 치유야 될 수 없겠지만 덧나지 않는 반창고 역할을 해준다. 두 번째 이유는 먹는 방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티스푼으로 크렘 브륄레의 설탕막을 내려치면 통쾌한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맛도 맛이지만 타격감으로 먹는 음식이 크렘 브륄레다. 세 번째 이유는 크렘 브륄레의 생김새가 사람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크렘 브륄레를 닮았다. 보드랍고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 튼튼해 보이는 막을 하나 씌워 두었다. 그 막이 얼마나 쉽게 깨지는지 나는 안다. 누군가 나를 힐난하는 말 한 마디에,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 하나에, 스쳐 지나가듯 던진 한 문장에, 내 마음은 쉽게 깨진다. 엄마는 아마도 다치기 쉬운 딸의 마음을 위해 크렘 브륄레를 만들어준 것은 아닐까. 앞으로 무수히 깨지고 복원하고, 다시 수리하고 또 부서지는 마음의 긴 행로를 응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혜원은 자신 때문에 삐친 친구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크렘 브륄레를 만들었다. 친구의 직장에 배달까지 해주고 명칭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불에 타버린 설탕을 걷어내면 새하얀 크림이 드러나듯 크렘 브륄레를 먹은 친구의 표정이 환해진다. 엄마에게서 배운 위로의 방법을 친구에게 사용하는 순간, 혜원은 자신이 받았던 위로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리틀 포레스트>는 계절을 느끼고 싶은 사람,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사람, 위로하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어울리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