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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언더그라운드

by 김중혁 202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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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일렉트로니카 듀오 ‘케미컬 브라더스’의 ‘Star Guitar’의 뮤직비디오는 내가 가장 자주 보는 영상 중 하나다. 뮤직비디오라곤 하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눈앞을 지나갈 뿐이다. 기차는 낮은 지붕의 집들을 지나고, 널찍한 초원을 지나고, 다리를 지나고, 공장 지대를 지나고, 기차역을 지나고, 반복되는 장면들이 음악의 비트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마치 영상에 맞춰 음악을 작곡한 듯한 생각이 들 정도다. 실은 그 반대였다. 뮤직비디오를 만든 감독 미셸 공드리는(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그 감독 맞다) 모눈종이에다 음악의 박자를 적어 넣은 다음 촬영해야 할 영상을 머릿속에 떠올렸고, 수많은 촬영과 편집을 통해 음악과 풍경의 박자를 일치시켰다. 음악의 미세한 비트에 맞게 영상을 재가공하여 새로운 풍경을 탄생시킨 것이다.

나는 기차만 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기 때문인지, 특유의 덜컹거림 때문인지, 기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정감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기차만 타면 책도 잘 읽히고 글도 잘 써지고 재미있는 생각도 잘 떠오른다. 두세 시간 기차를 타고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마음이 설렐 정도다. ‘와, 세 시간 동안 뭘 하면서 가지?’ 계획을 짤 때 마음이 들뜬다. ‘유레일 패스’를 들고 유럽 여행을 갔을 때는 매일매일이 축제 같았다.

철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속칭 ‘철덕(철도 덕후)’이라고 부른다. ‘철덕’들은 새로운 기종의 기차에 환호하고, 기차 시간표를 외우고, 자신이 좋아하는 노선의 역명을 다 외우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기차 시간표’를 외우는 사람이 내게는 가장 불가사의하다. 절대 도달하지 못할 집중력이라서 그럴 것이다. 숫자와 숫자로 이뤄진 시간표를 보면서 기차가 도착하는 장면과 떠나는 모습을 상상하는 그들의 모습은 경이롭다. 일본의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기차 시간표를 이용한 걸작 스릴러 <점과 선>을 발표하여 철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흥분시켰는데, 기차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그런 소설을 써보고 싶다.

김정근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언더그라운드>를 보면서 ‘이 사람도 기차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싶었다. <언더그라운드>는 부산 철도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의 모습을 오랫동안 화면에 담는 걸 보면, 좁고 어두운 지하의 터널을 빠져나가는 지하철의 모습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걸 보면, 플랫폼을 청소하는 사람들의 동선을 열심히 따라다니는 걸 보면, 기차를 관리하기 위해 거대한 쇳덩어리와 씨름하는 노동자들의 땀을 찐득하게 담아내는 걸 보면, 기차를 사랑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차 중에서도 지하철은 좀 특별하다. 지하철은 바깥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창밖의 풍경을 보는 대신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기차는 마주 앉아서, 혹은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하는 공간이지만 지하철은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공간이다. 여정의 아름다움보다는 목적지까지의 속도가 중요하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우연한 풍경들을 포기한 셈이다.

풍경이 사라지고 땅 속을 달리는 기차라는 특성 때문에 지하철의 공간은 현실 같지가 않다. SF의 공간, 판타지의 공간 같다. 영화에는 기관사가 지하철 운행을 마치고 퇴근하는 장면이 있다. 좁은 지하의 터널에다 지하철을 세워두는데, 기차가 아니라 거대한 동물 같다. 거대한 동물은 터널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 되면 다시 인간들을 실어나르고, 그 생활을 계속 반복하다가 문득 땅 위가 궁금해서 위로 올라가 인간을 집어삼키는…… 이야기가 일어날 것만 같은 풍경이다.

“터널이 좁아요. 곡선이나 이런 데서는 꼭 부딪칠 것 같고, 사고 나는 꿈도 많이 꿉니다. 1인승으로 바뀌면서 고립감이 엄청 심해요.”

기관사의 말에서 지하의 공간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기관실에 혼자 앉아서 지하철이 어두컴컴한 공간을 뚫고 지나가는 장면을 계속 보고 있으면 시간과 공간이 모두 사라질 것 같다.

영화 <언더그라운드>의 훌륭한 점은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공간을 오랫동안 보여준다는 데 있다. 철도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말로 설명하지 않고, 그냥 일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정말 오랫동안 보여준다. 이제 그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으면 좋겠는데도, 계속 보여준다. 온몸에 기름을 묻혀가면서 거대한 쇳덩어리와 씨름하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지하철의 지하에서 일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지하보다 더 아래의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지하철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아래에서 누군가 일해야 한다고, 지하의 아래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감독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언더그라운드>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소리다. 영화 내내 각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쇳덩어리가 내려앉는 소리, 거대한 물체가 굴러가는 소리, 견고한 곳을 드릴로 뚫는 소리, 납작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 두들기는 소리……, 온갖 소리의 향연으로 쉴 틈이 없다. 예전의 한 헤드폰 광고에서는 공사 현장을 지나가면서 헤드폰의 성능을 자랑하는 장면이 나온다. 헤드폰을 쓰자 시끄럽던 공사 소음들이 아주 작은 소리로 변하는 마법이 일어난다. 이름하여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다. 우리는 공사 현장의 소리를 소음으로 생각한다. 무엇인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거대한 것들을 부수고 자르고 두드려야 하는데, 그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 소리가 크고 시끄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소리를 내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동의 무게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는 대신, 사무실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일하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은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의 졸업 사진 촬영 장면이다. 아이들은 해맑게 웃으면서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학생들의 졸업 사진은 회사에 들어가게 됐을 때 사원증의 사진으로 쓰이게 된다. 졸업 사진이 학생들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혼자 운행하는 지하철에서 고립감이 심하다는 기관사의 말처럼, 아이들은 미래에 고독한 노동자가 될 확률이 높다. 다 함께 웃는 단체사진이 아니라 혼자서 어떻게든 버텨내야 하는 독사진이 이들의 미래가 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무인전철을 타고 퇴근하는 기관사의 모습이다. 전철이 땅 아래로 들어가면서 화면이 어두워진다.

우리는 편리함을 원하지만 편리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빠른 배송을 원하지만 빨라지기까지의 고단함을 알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고층에서 멋진 풍경을 볼 날을 꿈꾸며 열심히 일하지만, ‘언더그라운드’에서 누군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잊어버렸다가도 문득 생각나지만, 그냥 묻어둔다. 일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는 핑계로, 나중에 시간 날 때 생각해야겠다는 핑계로, 그냥 묻어둔다. 언더그라운드는 뭔가 묻어두기에 딱 좋은 공간이다. <언더그라운드>는 우리가 지하에 묻어둔 것들을 계속 끄집어내는 영화다.

 

 

 

 
언더그라운드
모두가 잰걸음으로 땅 위 삶을 향해 지하를 거쳐만 갈 때 `언더그라운드`에는 이 반듯한 공간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시끄럽게만 돌아가는 세상 아래 지하에서의 삶은 어떠한지 그들에게 다가간다 도시를 지탱하는 지하의 노선도, 언더그라운드
평점
8.2 (2021.08.19 개봉)
감독
김정근
출연
강성운, 정철, 엄우철, 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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