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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지니어스

by 김중혁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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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생전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지심 같은 것일까, 뛰어난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 같은 것일까. 그것보다는 함부로 누군가에게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결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천재’라는 단어는, 놀라운 능력에 대한 평가일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노력해 온 그 사람의 시간을 무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천재(天才)란,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을 일컫고 문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뜻한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 모두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늘에서 한 가지 재능은 내려받았고,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분명히 있다. 그 재주를 언제, 어디서 쓸 수 있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작가 중에는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이 많다. 보들레르도 있고, 이상도 있고, 백석도 있고, 버지니아 울프도 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있다. 당대에 천재라 불린 사람도 있고, 사후에 천재로 불리는 사람도 있다. 천재 작가로 불리는 이유를 (내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예민했거나, 예전에 보지 못했던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거나, 시대를 앞서 가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거나, 일찍 죽었거나…… 등등 다양하다. 내가 알기로 글을 쓰는 사람들 중에 (천재라고 불린 사람들을 포함하여) 자신이 천재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호칭을 받아들이는 순간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이 쓰고 있는 하찮은 글에 짜증나고, 더 나은 문장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번에도 실패했다는 생각 때문에 의기소침해하는 사람들이다. 가끔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는 ‘과대망상’이 생길 때도 있지만, 이내 자신을 별것 아닌 작가로 여긴다.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한다면, 더이상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천재가 되고 싶지 않다. 보통 사람이 되는 데도 이미 충분히 많은 문제가 있다.” 주변에 몹시 싫어하는 사람이 글을 쓰고 있는데 그 사람이 더이상 글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하루에 한 번, 아니면 식후에 한 번씩, ‘천재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러주면 된다.

영화 <지니어스>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제목이다. 1929년을 배경으로 유명 출판사의 편집자 ‘맥스 퍼킨스’와 작가 ‘토마스 울프’의 우정을 다룬 영화인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제목이 지니어스일까?’라는 물음이 생긴다. 영화 속 누군가가 천재란 이야기인데, 두 사람 중에 누가 천재일까? 토마스 울프는 격정으로 가득 찬 작가다.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들이 넘쳐흐르고, 주체할 수 없는 그 단어들을 종이에 쏟아붓고, 함께 있는 사람들의 혼을 뺄 정도로 말을 많이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재의 모습이다. 토마스 울프는 미국 현대 문학에서 전설로 통하는 작가이며, 잭 캐루악, 필립 로스 등의 대가들이 존경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서른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작품의 수는 많지 않지만 ‘재즈적인 글쓰기’로 문학의 영토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천재라고 부를 만하다.

영화는 맥스 퍼킨스로 시작해서 맥스 퍼킨스로 끝난다. 나오는 분량도 훨씬 많다. 맥스 퍼킨스가 주인공 같다. 맥스 퍼킨스는 어리숙한 초보 작가 토마스 울프에게 정확한 조언을 해준다. 너무 장황한 문장들을 함께 다듬고, 부정확한 표현을 지적해준다. 독특하기는 하지만 대중적이지 않은 울프의 작품을 한눈에 알아본 것도 맥스고, 책 출간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울프를 달래준 것도 맥스였다. 이쯤 되면 진짜 천재는 맥스 퍼킨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즉흥적이고 말 많고 예의 없이 오만방자한 토마스 울프, 규칙적인 삶을 살면서 정확한 문장처럼 하루를 꾸려내는 맥스 퍼킨스…… 우리는 대체로 토마스 울프 같은 사람을 천재로 부르길 좋아하지만 영화를 만든 마이클 그랜디지 감독은 ‘맥스 퍼킨스가 진짜 지니어스’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어 단어 ‘genius’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다. 라틴어 ‘genius loci’는 ‘땅을 지키는 수호신’을 뜻한다. ’천재’라는 뜻말고 ‘수호신’이라는 뜻도 있는 셈이다. 영화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쓴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와 토마스 울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genius’가 등장한다.

토마스 울프 :  자네가 맥스 퍼킨스와 친구인 건 알지만, 아마 짐작도 못할 거야. 나를 불구자로 만들었어. 내 작품을 변형시켰다고. 본인도 인정했어. 그래놓고는 내 성공의 공로를 본인이 다 가로챘지.

스콧 피츠제럴드 : 맥스는 그런 적 없어. 네가 준 상처는 또 어떻고?

토마스 울프 : 서로 상처를 줬어.

스콧 피츠제럴드 : 톰, 꾸며내서 말하지 마.

토마스 울프 : 그가 한 짓을 몰라서 그래.

스콧 피츠제럴드 : 맥스가 한 짓? 뭘 어쨌는데? 네 꿈을 실현시켜줬잖아. 경력을 시작하게 해주고 삶을 바꿔줬잖아.

토마스 울프 : 이거 봐, 출판사에서 퍼뜨린 말을 그대로 하잖아.

스콧 피츠제럴드 : 모두가 널 외면할 때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야. 꿈과 희망을 너에게 걸었다고. 자기가 쓴 글도 아닌데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못난 자격지심으로 되갚아? 창피한 줄 알아. 맥스는 진실한 우정으로 대하는데 (That man has a genius for friendship)그걸 뿌리치는 건 바로 너야. 네가 언젠가는 지금의 자리에서 내려올 거고,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 시작될 거야. 내가 알아. 그 시간을 함께해줄 친구에게 왜 상처를 주나?

영화에서는 ‘진실한’이라는 단어로 번역됐지만, 나는 저 문장을 ‘우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데’라고 번역하고 싶다. 감독이 영화의 제목을 ‘지니어스’로 지은 이유는 맥스 퍼킨스가 친구를 대하는 태도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맥스 퍼킨스는 좋은 편집자다. 그는 좋은 편집자가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런 덕목은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것이니까.) 첫째, 좋은 작가를 발견할 줄 아는 눈. 둘째, 작품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거리감. 셋째, 작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마음속 풍경을 정확한 문장으로 옮길 줄 아는 언어 감각. 넷째, 작가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마음. 그리고 다섯 번째는 자신의 일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다.

맥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내가 자네 글을 변형시키는 것 같아서 늘 두려워. …… 우리가 정말 글을 좋게 바꾸고 있나? 그저 변형시키고 있나?”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즐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겠지만, 누가 누굴 이긴다는 표현 자체는 좀 바꿀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생각이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며, 즐기는 사람은, 그냥 즐기는 거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은연 중에 ‘천재’와 ‘일반인’을 나누고, 노력을 통해 천재를 이겨야만 뭔가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잘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잘 지켜내는’ 것이다.

 

 

 
지니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길들이고 ‘스콧 피츠제럴드’를 조력한 최고의 편집자 `맥스 퍼킨스`, 야수 같은 천재 작가 ‘토마스 울프’를 만나다! 1929년 뉴욕. 유력 출판사 스크라이브너스의 최고 실력자 ‘퍼킨스’(콜린 퍼스)는 우연히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작가 ‘울프’(주드 로)의 원고를 읽게 된다. 방대하지만 소용돌이와 같은 문체를 가진 그의 필력에 반한 ‘퍼킨스’는 ‘울프’에게 출판을 제안한다. 서정적이고 세련된 ‘울프’의 감성에 냉철하고 완벽주의적인 ‘퍼킨스’의 열정이 더해져 탄생한 데뷔작 [천사여, 고향을 보라]는 출판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또 하나의 천재 작가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성공 이후에도 ‘울프’는 쏟아지는 영감과 엄청난 창작열로 5,000 페이지에 달하는 두 번째 원고를 탈고해 ‘퍼킨스’에게 건네고 이들은 다시 한번 오랜 편집 과정에 돌입한다. 한편, ‘울프’가 쓴 글의 첫 독자였던 연인 ‘엘린’(니콜 키드먼)은 자신보다 작업에 몰두하고 ‘퍼킨스’만을 찾는 ‘울프’를 보며 절망감에 휩싸이고 ‘퍼킨스’ 또한 성공 이후 광적으로 변해가는 ‘울프’와 서서히 의견 충돌이 생기게 되는데… 3월, 대개봉
평점
7.5 (2017.04.13 개봉)
감독
마이클 그랜디지
출연
콜린 퍼스, 주드 로, 니콜 키드먼, 로라 리니, 가이 피어스, 도미닉 웨스트, 바네사 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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