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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프리 가이

by 김중혁 202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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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후회한다. 흐르는 시간 위에 살기 때문이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고, 같은 시간을 다시 살 수 없다. 우리는 과거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시간 위를 걸어간다. ‘그때 다른 걸 선택했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혹은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내 삶이 나아졌을까?’. 시간은 한참 후에야 우리의 질문에 답해준다. 때로는 끝내 알 수 없기도 하다.

그러니 시간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후회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은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을 이야기로 만든다. 상상력을 발휘한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경험을 해보게 만든다.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나쁜 길을 선택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우리는 혀를 끌끌 차며 ‘그 길로 가지 마!’라고 속으로 외치지만, 우리 역시 비슷한 선택을 자주 해왔다는 걸 깨닫는다. 주인공은 대개 잘못된 선택을 하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다시 실패하고,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거나, 끝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해피 엔딩이거나 새드 엔딩이거나. 우리의 미래도 아마 그럴 것이다.

‘타임 루프(Time Loop)’ 장르는 ‘시간’이라는 소재를 가장 흥미롭게 사용하는 것 같다. 타임 루프란 주인공이나 주요 인물이 시간의 고리 속에 갇혀 특정 시간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이야기다. 되풀이되는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능력치를 향상시키고, 어떤 사람은 세상을 구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

이 장르 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1993년 작품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이다. 성촉절을 취재하러 간 기상 캐스터 필 카너즈(빌 머레이)가 2월 2일에 갇히는 이야기다. 자고 일어나도, 차에 부딪혀서 죽어도, 자살을 시도해봐도, 계속 2월 2일이 반복된다.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는 걸 알아챈 주인공이 맨처음 떠올린 아이디어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매일 만나 조금씩 정보를 얻어낸 다음 마치 자신이 운명의 남자라도 되는 양 사기를 치는 것이다. 성공하지만, 별 의미는 없다. 다음날이면 새로운 날이 펼쳐져야 하는데, 또다시 2월 2일. 관계의 발전이란 게 불가능하다.

주인공은 은행을 털기도 하고, 난폭 운전도 한다. 어떤 사건을 벌이든 자고 일어나면 다시 2월 2일이다. 주인공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반복되는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매일 얼음 조각을 연습해 훌륭한 조각가가 되고,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가 되며, 책을 끊임없이 읽어서 달변가가 되는가 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미리 알아챈 다음 위기에서 사람들을 구해낸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주인공 필 카즈너의 두 가지 삶의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삶이 따분해서 삶의 의욕을 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시간의 틈을 이용해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타임 루프 장르 중에는 인간과 시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많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는 게임 속에 던져진 것 같은 인간의 숙명을 탁월하게 그리고 있고, <소스 코드(Source Code)>는 주어진 8분이라는 시간을 반복해 겪으면서 열차 테러범을 추적한다는 설정이 돋보이는 멋진 스릴러다. 마지막 장면은 가슴 뭉클해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시간이 반복되는 타임 루프 형식의 영화들은 편집이 무척 중요하다. 어떤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어떤 장면을 생략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연속해 보여주면 똑같은 하루가 지겹도록 반복된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 똑같아 보이는 하루의 미세한 차이를 부각시키면, 관객의 시선을 곧바로 잡아챌 수 있다. 그때그때 어떤 장면에 힘을 실어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을 편집하는 사람들이다.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할 때 우리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의미도 두지 않는다. 출근 버스를 타고 똑같은 길을 달리면서 비슷한 음악을 듣고, 비슷한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목적지에 도착한다. 출근 장면은 기억 속에서 편집해버리는 셈이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우리는 눈 앞에다 그날의 단편 영화를 상영한다. 어제와 거의 비슷했던 하루의 틈에 다른 날과는 조금 달랐던 순간의 감흥을 집어넣는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보면, 어제와 비슷한 오늘이 시작된다. 타임 루프는 아니지만, 거의 타임 루프라고 생각될 만큼 비슷한 하루다.

2021년에 개봉한 영화 <프리 가이(Free Guy)>는 타임 루프 장르와 게임 형식을 결합시켰다. 주인공 ‘가이’는 폭력과 총격전이 난무하는 도시 ‘프리 시티’에 살고 있지만, 직장과 친구와 한 잔의 커피와 반복되는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이상형 ‘밀리’와 마주친 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프리 시티’는 실재하는 도시가 아니라 ‘오픈 월드’ 게임이며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게임 속의 NPC(Non-Player Character)라는 것이다. NPC는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얻어맞고 살해당하고 도망치는 역할을 하는 게임 속 배경이다. 자신이 삶의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하찮은 존재인 걸 알게 된 순간, 가이는 실망한다. 이상형에게 반했던 떨리는 마음 역시 프로그래밍됐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이는 절망한다. 가이는 자신의 이상형이었던 밀리에게 소리친다.

“평생 이게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다가 당신을 봤어요. 그때서야 내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순간만큼은 날아갈 것 같았어요. 당신은 몰라요. 우린 다르니까요. 당신은 진짜잖아요. 난 뭐죠? 진짜가 아닐지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프리 시티> 속에는 여러 영화가 녹아 있다. 자신이 갇힌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닫는 건 <트루먼 쇼>를 떠올리게 하고, 반복되는 게임 속에서 능력치를 올리는 임무를 부여받는 건 <엣지 오브 투모로우>와 흡사하다. 자세하게 말할 수 없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사랑의 블랙홀>과 닮은 데가 있고, <데드풀>의 주인공인 라이언 레이놀즈가 주인공을 맡은 덕분에 대사를 들을 때마다 데드풀이 떠오르며, <어벤져스>의 등장인물들이 부분부분 인용되고, 게임 속 액션 장면은 <주먹왕 랄프>의 질감이며, 아바타와 현실의 사람들이 뒤얽히는 건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관을 이어받은 것 같다.

<프리 시티>가 아주 독창적인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다. 가이는 평범한 NPC에서 슈퍼히어로로 변모한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역시 ‘배경으로 사는 평범한 삶을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고결함을 되찾자’ 류의 자기 계발서에서 많이 본 듯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모든 게 뒤엉켜 있고, 어수선하고, 때로는 도식적이고 진부한데, 한편으로는 새롭기도 하다.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고 유쾌한 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시간과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영화가 어수선한 만큼 보는 사람들마다 다른 질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자기 전, 이 영화를 본 사람들 각자가 자신만의 영화를 상영하게 될 것이다. 나의 질문은 이랬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NPC라고 생각하는 플레이어들이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플레이어라고 생각하는 NPC가 아닐까? 우리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어딘가의 배경이 되고, 어딘가의 배경으로 살면서도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내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프리 가이
“내 안의 히어로가 깨어난다!” 평범한 직장, 절친 그리고 한 잔의 커피. 평화로운 일상 속 때론 총격전과 날강도가 나타나는 버라이어티한 ‘프리시티’에 살고 있는 ‘가이’. 그에겐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우연히 마주친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기 전까지는…갖은 노력 끝에 다시 만난 그녀는‘가이’가 비디오 게임 ‘프리시티’에 사는 배경 캐릭터이고,이 세상은 곧 파괴될 거라 경고한다.혼란에 빠진 ‘가이’그러나 그는 ‘프리시티’의 파괴를 막기 위해더 이상 배경 캐릭터가 아닌,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한다.올여름, 시원하게 터지는 상상초월 엔터테이닝 액션 블록버스터8월, 인생의 판을 바꿀 짜릿한 반란이 시작된다!
평점
7.7 (2021.08.11 개봉)
감독
숀 레비
출연
라이언 레이놀즈, 조디 코머, 릴 렐 하우어리, 타이카 와이티티, 우카시 암부카, 채닝 테이텀, 브리트니 올드포드, 조 키어리, 매티 카다로플, 카밀 코스텍, 알렉스 트리벡, 소피 레비, 마이클 토우, 테이트 플레처, 오웬 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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