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1월이 되면 캐롤을 듣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마음은 눈곱만큼밖에 없고, 그냥 그 노래들이 좋기 때문이다. 캐롤만 들으면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서 추운 겨울도 견딜 만하다.
음악 장르마다 저마다의 온도가 있는 것 같다. 헤비메탈은 끓어넘쳐야 하니까 100도가 넘을 것 같고, 쿨 재즈는 이름 그대로 영상 10도 아래의 쌀쌀한 기운이 노래를 감싼다. 피아노 소나타가 17도 정도의 쾌적한 온도라면, 크리스마스 캐롤은 22도 정도의 따듯한 실내가 떠오르는 음악이다. 캐롤에 등장하는 악기의 음색이나 노래하는 가수들의 발성법은 대체로 포근하고, 가사 역시 따뜻한 말들로 가득하다. 복수심이나 헤어진 연인을 증오하는 마음이 담긴 가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주변의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자든가 어떤 선물을 골라야 할지 힘들다는 식의 훈훈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런 노래를 들으면서 나쁜 마음을 먹기 힘들다.
차가운 겨울이 올 때마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소설 <작은 아씨들>이 생각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야기에 온기가 가득하다. 다 읽고 나면 마음의 온도가 2도 정도 올라간다. 노예 해방 전쟁에 참가한 아빠,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베풀 줄 아는 엄마, 그런 따뜻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밝은 기운이 넘쳐나는 네 자매 메그, 조, 베스, 에이미의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도 너무 잘 어울린다. 게다가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 역시 크리스마스 즈음이다.
<작은 아씨들>은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가장 최근의 리메이크 영화는 뛰어난 배우이기도 한 그레타 거윅이 연출했다. 소설만큼이나 온기가 가득하며, 동시대의 날카로운 감각까지 들어 있어서 지금까지 나온 <작은 아씨들> 리메이크 중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시작은 원작과 조금 다르다. 원작은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냐?”고 울부짖는 어린 조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영화는 출판사 문 앞에 서 있는 조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출발한다. 원작자 루이자 메이 올콧은 조를 자신의 분신으로 삼았고, 함께 자란 자매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옮겼다. 출판사 앞에 서 있는 조의 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은 ‘네 명의 작은 아씨들’ 이야기에다 원작자의 이야기를 덧붙이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행복했던 어린 시절과 가슴 아픈 성장기와 힘겹게 살아가는 현재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배합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의 소설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조는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자신이 쓴 대본으로 연극을 만들기도 했다. 타고난 작가인 셈이다. 그렇지만 조는 자신의 재능을 믿지 못했다. 출판사에 갔을 때에도 “친구가 원고를 좀 팔려고 하는데, 봐줄 수 있나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존재를 감춘다. 벽난로 옆에 서서 치마에 불이 붙어도 모를 정도로 몰두하며 글을 쓰지만, 아무도 자신이 쓴 소설을 재미있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썸을 타던’ 남자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솔직하고 신랄하게 평을 하자 쌓여 있던 불안과 불만이 폭발해버린다.
“당신이 명작, 졸작 판단하는 재판관이라도 돼요?”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없으니 화를 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자신의 작품이 지나치게 대중적이라는 프리드리히의 비판에는 이렇게 변명한다.
“셰익스피어는 대중을 위해 썼어요.”
“셰익스피어가 대단한 건 대중 작품 속에 시를 녹였기 때문이죠.”
프리드리히는 여유 있게 대답한다. 좀 재수없긴 하지만, 맞는 말이다. 조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서 자포자기의 말투로 이어진다.
“나는 셰익스피어가 아니에요.”
이어지는 프리드리히의 결정적 한 방.
“다행이네요. 그분은 이미 있으니까.”
‘셰익스피어는 이미 있다’는 프리드리히의 말은 셰익스피어의 길을 쫓아가지 말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라는 이야기겠지만 주눅들어 있는 조에게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 리가 없다. 조는 프리드리히에게 ‘당신은 더이상 내 친구가 아니’라며 절교를 선언한다. 나중에 두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원작 소설이나 영화를 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우리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자포자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자신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 사람의 응원이다. 예술가는 딱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성장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조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작가로서의 조를 지지하는 세 명의 자매와 엄마 아빠가 있었으니까.
몸이 아픈 베스는 언제나 언니 조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대문호들의 멋진 문장보다도 생생한 조의 소설과 말투를 좋아했다. 소설을 그만 쓰겠다는 조에게 베스가 간절히 애원한다.
“그럼 날 위해 써줘. 언니는 작가잖아. 누가 알아주기 전에도 작가였잖아.”
책을 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이야기가 솟아오르고 계속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알아주기 전에도 이미 작가다. 베스는 어릴 때부터 작가로서의 조를 인정해준 셈이다.
조는 자신이 쓰는 이야기가 하찮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투닥대고 웃고 하는 이야기를 누가 읽겠냐’며 ‘중요할 것도 없는 얘기’라고 자신의 소설을 깎아내렸다. 철없어 보이던 막내 에이미는 언니의 말에 대든다.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지. 그런 글을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에이미의 이 말은 감독 그레타 거윅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급변하는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 기후 변화, 정치 게임과 같은 커다란 목소리 사이에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서로를 응원해주자’는 이야기는 무척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야말로 끊임없이 이야기해야만 중요해진다. 가족끼리 투닥대는 하찮아 보이는 이야기를, 1868년에 쓰여진 이야기를, 우리는 아직까지 읽고 있고, 새로운 버전으로 계속 재생산하고 있다.
조는 자신을 위해 이야기를 써달라는 베스를 위해, 하찮아 보이는 이야기가 중요해질 수 있도록 계속 써달라는 에이미를 위해 글을 썼고, 명작을 탄생시켰다. 소설 속의 조는 학교를 세우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너무 늦기 전에 그 아이들에게 삶은 즐거운 거라고 알려주고 싶었어요. 제때 도움받지 못해 인생을 망치는 아이들을 많이 봤거든요. 그 아이들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요. 그 아이들의 꿈과 고민이 뭔지 알 것 같아요.”
누군가 자신을 백 퍼센트 지지해준 경험을 겪은 사람은,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어한다. 그런 경험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상 쓸모 없어 보이는 때에, 자신이 만든 작품이 너무나 빈약해 보일 때에, ‘그렇지 않다’고 ‘너는 이미 잘하고 있다’고 건네주는 한 마디는 날개와 다름없다. 우리는 날개 없이 태어나지만, 서로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

- 평점
- 7.3 (2020.02.12 개봉)
- 감독
- 그레타 거윅
- 출연
- 시얼샤 로넌, 엠마 왓슨, 플로렌스 퓨, 엘리자 스캔런, 로라 던, 티모시 샬라메, 메릴 스트립, 제임스 노튼, 트레이시 레츠, 밥 오덴커크, 루이 가렐, 제인 하우디쉘, 크리스 쿠퍼, 마리안 플런킷, 아나 케인, 대쉬 바버, 사샤 프롤로바, 루이스 D. 윌러, 젠 니콜라이센, 애비 퀸, 로니 파머, 에드워드 플렉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