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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퍼스트 카우

by 김중혁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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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개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가 두 구의 해골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개가 갑자기 땅을 파기 시작했고, 흙 속에서 하얀 해골이 드러났다. 우선 당신은 깜짝 놀랄 것이다. 거기서 누군가 죽었다는 뜻이니까. 그렇지만, 해골은 보기에 끔찍하지 않다. 거기에는 진물도 없고 구더기도 없고 악취도 없고 핏자국도 없다. 시체가 썩어서 해골만 남을 때까지 수많은 시간이 흘렀고, 시간은 인체의 윤곽을 없애고 사람의 특징을 지웠다. 두려움이 걷히고 나면 당신은 해골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긁어 낼지도 모른다.


당신이 과학자라면, ‘탄소연대측정법’으로 해골이 묻힌 시기를 조사하고 싶을지 모른다. 당신이 사진 작가라면, 뼈만 남은 두 사람의 기괴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을 것이고, 화가라면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것이다.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그 장면을 특별한 기억으로 남기고 싶을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낯선 일이고, 일상적이지 않은 경험이다. 갑자기 경험하는 누군가의 죽음은-그게 오랜 시간이 지난 해골이라 할지라도- 특별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지금의 삶을 도드라져 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2021년에 만난 인생 영화 중 하나인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는 그렇게 시작한다. 한 여성이 개와 함께 산책하다가 두 구의 해골을 발견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여성은 아마도 감독의 분신일 것이다. 우연히 두 구의 해골을 발견한 감독의 상상이 시작된다. 해골의 정체는 누구일까? 무덤도 아닌 곳에 두 사람이 묻힌 이유는 무엇일까? 두 사람의 성별은 무엇이었을까?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싸우다가 같이 죽은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다 함께 죽은 것일까? 감독은 두 사람의 죽음을 발견한 후, 두 사람의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을 되돌려 서부 개척 시대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1820년대 미국의 오리건,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요리사 ‘피고위츠’ (별명은 ‘쿠키’)는 중국인 도망자 ‘킹 루’를 구해준다. 마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함께 생활하며 돈 벌 궁리를 하다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마을에 처음으로 들여 온 암소에게서 몰래 우유를 짜낸 다음 비스킷을 만들어 판다는 계획이다. 제목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퍼스트 카우’, 즉 마을 역사상 최초의 암소란 뜻이다. 제목에서부터 긴장감이 느껴진다. 마을의 유일한 암소에게서 우유를 훔쳐 비스킷과 케이크를 만든다면 주인이 눈치채지 않을까? 우유를 훔쳐 마시는 거라면 들킬 가능성이 적겠지만 비스킷을 만들어 판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모험이 아닐까? 비스킷이나 케이크에서 우유 맛을 감출 수 있을까? 귀여운 어른 두 명이 주인공이고, 맛있는 케이크 냄새가 화면 밖으로 흘러나오는 후각 자극 영화인데도 보는 내내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제목에 고스란히 담겼다.


두 사람이 만들어 파는 비스킷 노점은 금세 맛집으로 소문이 났다. 웃돈을 얹어서라도 사 가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치기가 난무한다. 먹어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한다. 밀가루와 물로 만든 퍽퍽한 빵만 먹던 그들에게 우유가 들어간 달콤함은 천상의 맛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비스킷 노점의 장사가 잘 되면 잘될 수록 관객들은 불안해진다. ‘어, 저러다가 걸릴 텐데, 저러다가 모든 게 발각될 텐데…….’ 간이 콩알만해진다.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감독의 기술은 그저 감탄스럽다. 젖소의 주인인 마을의 권력자 팩터가 비스킷을 먹는 장면은 올해의 가장 이상한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엔 지극히 평범한 장면이다. 피고위츠는 평온한 얼굴로 바삭한 비스킷에다 꿀을 바르고 시나몬 가루를 뿌린 다음 팩터에게 건넨다. 팩터는 비스킷을 먹으며 ‘런던에 있을 때 먹었던 바로 그 맛’이라며 감탄한다. 자신의 젖소에서 짜낸 우유로 만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걸 맛있게 먹는 장면이 이렇게도 초조할 일이란 말인가. 미식가 팩터가 그 속에 든 우유를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 꿀과 시나몬 가루를 더 많이 발라서 우유의 맛이 희석되길 바라는 마음 같은 게 복잡하게 뒤엉킨다. 옆에서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는 킹 루의 얼굴은 모든 관객의 표정과 같을 것이다.


피고위츠와 킹 루는 범죄자들이다. 우유를 훔쳤다. 훔친 우유로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두 사람을 응원하게 되는 것일까? 왜 그들이 처벌 받지 않길 바랄까?  (물론 처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선 그들은 우리와 같은 약자들이다. 권력자 팩터는 ‘처벌이 엄격할수록 더 바람직한 성과를 낸다’는 생각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잘만 유도하면 사형도 결국은 유용할 수 있’으며 ‘나태한 자들에게는 사형이 강한 동기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팩터에게 걸리면 두 사람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두 사람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범죄가 발각되지 않길 바라게 된다.


두 사람을 응원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우유를 훔치는데 착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감독은 두 사람의 선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 오랫동안 공을 들인다. 두 사람은 총을 쏘며 사냥하지도, 난투극을 벌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쫓기는 사람들이다.


피고위츠는 쫓기는 킹 루를 살려준다. 킹 루는 갈 곳 없는 피고위츠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준다. 킹 루가 살 곳을 제공하자 피고위츠는 빗자루를 들고 집을 청소하고, 들꽃을 꺾어 와서 집을 장식한다. 꽃으로 꾸며진 집을 보고 킹 루는 이렇게 말한다. “훨씬 나아 보이네.” 피고위츠는 우유를 훔치면서 소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긴 여행에서 가족을 잃은 소의 슬픔을 애도하고, 이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한다. 소에게서 젖을 훔치면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다. 후반부의 위급한 장면에서도 두 사람은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서로를 위하고, 배신하지 않는다.


영화는 공정의 의미를 묻는다. 또 다른 장발장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권력자들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착한 사람들이 작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가? 두 사람이 백인이 아니라는 게 중요할 것이다. 킹 루는 중국인이고, 피고위츠는 유대인이다. 영국인이나 원주민 인디언이 아닌, 완전한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마을에 들어온 암소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는 장면이 있다. “여기선 암소 못 키워, 그래서 애초에 없던 거야.”라고 누군가 말하자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대꾸한다. “애초에 없던 건 백인도 마찬가지지.” 애초에 없던 백인이  갑자기 들어와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미국 땅에서 벌어졌던 셈이다.
결론은 정해져 있다. 두 사람은 죽는다. 어떻게 죽는지는 영화에서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지막은 평온하고 다정하다.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당신은 두 구의 해골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까? 당신이 떠올리는 그 이야기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설명해줄 것이다.

 

 

 

 
퍼스트 카우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평점
8.1 (2021.11.04 개봉)
감독
켈리 라이카트
출연
존 마가로, 오리온 리, 토비 존스, 테드 루니, 딜런 스미스, 존 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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