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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종착역

by 김중혁 202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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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치 바이어스의 아름다운 동화 <열네 살의 여름>에서는 열네 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사라의 마음은 불만으로 가득 찼다. 자기 자신과 자기 생활과 식구들에 대해 화가 나고, 다시는 어느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네 살이란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는 나이다. 말하자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나이, 혹은 무언가를 처음으로 잃어버리는 나이, 어쩌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 나이, 그게 열네 살인 것 같다.


세계 최고의 기업 ‘애플’을 만든 스티브 잡스는 열네 살 때 주파수 측정기를 만들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룹 비치 보이스의 ‘Surfin’ USA’를 듣고 ‘부드러운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뭘 했나 생각해보면, 기타를 처음 사서 비틀즈의 ‘Yesterday’를 부르고 있었다. 방안에 틀어박히길 좋아했고, 슬슬 부모님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한국의 열네 살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는 나이니까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베치 바이어스는 작품 속에 이런 말도 남겨놓았다.


“갑자기 사라는 삶이란 높낮이가 다른 계단이 길게 펼쳐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낮은 계단을 계속 밟고 올라갔는데, 열네 살 때 갑자기 계단이 높아진 느낌. 평소처럼 발을 들어서 계단을 오르려는데, 계단에 발이 걸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던 아찔함.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계단의 높이. 어떨 때는 생각보다 계단이 높았고, 어떨 때는 갑자기 낮아진 적도 있지만, 삶이라는 계단은 높낮이가 일정치 않다는 걸 열네 살 때 처음 깨달았다.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영화 <종착역>은 열네 살 여자 중학생 네 명이 주인공이다. 사진 동아리 ‘빛나리’ 부원인 시연, 연우, 소정, 송희는 동아리 선생님에게 ‘세상의 끝을 찍어오라’는 방학 숙제를 받는다.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 네 명의 열네 살은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의 끝’을 이야기하다 지하철 1호선 신창역으로 향하게 된다. 지하철 종착역에 가면 세상의 끝을 만날 수 있지 않겠냐는 한 명의 제안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옷깃만 스쳐도 웃음이 터져나오던 열네 살의 아이들은,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 여정에 조금씩 지쳐가고, 의도하지 않던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줄거리만으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영화이고, 별다른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열네 살 아이들의 솔직하고 발랄한 모습이다.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카메라를 신경 쓰지 않는 아이들의 연기나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뒤섞여도 신경 쓰지 않는 감독들의 연출 때문에 아이들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의 주제도 종잡을 수 없다. 자습과 선행 학습에 대한 진도를 확인하다가, 경로당의 미러볼을 보고는 예전에 이 장소가 클럽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더니, 서로 으르렁거리는 두 마리의 개를 보고는 “확실히 서로를 싫어하는 걸 보니 부부가 맞는 것 같군.”이라는 생활 속 깨달음에서 비롯된 농담도 던진다.


아이들은 신창역에 가서 깨닫는다. 종착역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의 끝까지 가려면 한참 더 남았고, 종착역은 오히려 기차가 돌아나오는 반환점이라는 사실을. 어디가 끝이냐고 물어보러 갔던 아이는 이런 답을 들고 온다. “여기는 끝이 없대. 철로가 계속 이어진대. 그래서 버스 타고 20~30분 더 가면 옛날 신창역이 있대.” 그런 식으로 끝을 찾아 가다보면 옛날 더 옛날로 가야 하고, 자신들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이들이 상상했던 끝은, ‘벽처럼 탁 하고 가로막힌 곳’이거나 누가 봐도 끝이라고 생각되는 끊어진 길 같은 곳인데, 세상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다.


보통 여러 명이 길을 떠나면 싸움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종착역>에는 그 흔한 말싸움도 거의 없다. 보는 내내 흐뭇하다. 아이들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약간의 의견 대립을 하지만 싸우지는 않는다. 길을 잘 찾지 못하는 친구를 타박하지만 계속 믿으며 따라가고, 계획이 뒤틀어져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시골에서 밤을 맞아도 출발한 걸 후회하지 않으며, 신창역에 가자는 아이디어를 낸 친구를 비난하지 않는다. 이 길이 맞나, 아닌가, 맞나, 아닌가 여러 번 되물을 정도로 길을 찾는 게 서툴지만 길에서 만나는 우연의 풍경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꽃 이름을 얘기하고,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갑자기 내린 비와 함께 논다. 아이들은 돈을 모아서 택시를 타고 돌아갈 수 있었지만, 대신 맛있는 저녁을 사 먹는다.


<종착역>이 열네 살 아이들을 다루는 태도 중 돋보이는 것은 친구를 대하는 방식이다. 집단 따돌림 문제나 교내 폭력의 현실을 뉴스에서 자주 대하지만, 영화 속 아이들은 평화롭게 공존한다. 네 명의 아이들이 똑같은 비율로 서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사랑을 주고받으면 좋겠지만, 세상에 그런 관계는 없다. 처음에는 셋이서 친했다. 그러다 둘이 친해지게 됐고, 남은 한 명은 조금 섭섭했다. 그렇지만 셋이서도 잘 놀았다. 그러다 전학 온 친구 한 명이 더 생겼다. 넷이 친했졌다. 함께 잘 놀았고, 혼자서 섭섭해 했던 한 명과 전학 온 한 명이 친해졌다. 이제는 친한 두 명과 친한 두 명이 모인 네 명이 되었고, 넷이서도 함께 잘 놀았다. 열네 살 아이들은 알게 됐을 것이다. 높은 계단과 낮은 계단이 공존하듯 친한 사람과 덜 친한 사람들이 모여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두운 방에 네 명의 열네 살들이 모여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후반부는 감동적이다. 세상의 끝을 사진으로 찍을 수는 없지만 세상의 끝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살아 있을 때 해주지 못한 것들을 손녀들이 아쉬워한다.


아이들이 할머니가 됐을 때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밤, 세상의 끝을 보러 갈 마음이 없었더라면 듣지 못했을 이야기가 열네 살에 남았고, 그들은 낯선 시골 마을의 선연한 밤과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를 평생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할머니가 되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 다른 아이가 말했다.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거니까 나는 별로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거지.” 또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안 살고 싶어. 늙기 싫다는 거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아이들은, 높낮이가 다른 각자의 계단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열네살의 여름
-
저자
베치 바이어스
출판
소년한길
출판일
2003.03.25
 
종착역
사진 동아리 `빛나리` 부원인 시연, 연우, 소정, 송희는 `세상의 끝`을 찍어 오라는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신창역으로 향한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친구들은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 여정에 점점 지쳐가고, 낯선 곳에서 14살 첫 여름방학을 마주하게 된다.
평점
5.9 (2021.09.23 개봉)
감독
권민표, 서한솔
출연
설시연, 배연우, 박소정, 한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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