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때 어떤 인사를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다. “잘 가.” “조심해서 가.”처럼 상대방의 안전을 걱정해주는 인사가 있는가 하면, “다음에 봐.” “곧 만나.”처럼 ‘조만간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담는 인사도 있다. 어떤 사람과 헤어지는가에 따라서도 인사가 달라지는 것 같다. 연인과 헤어질 때면 다시 만날 시간을 손꼽게 되므로 “들어가서 연락해.” “헤어지기 싫다.”같은 깨소금 볶는 인사가 가능해지고, 조만간 만나기 힘든 사람과 헤어질 때는 “건강하세요.” 같은 인사를 하게 된다. 속뜻은 이렇다. ‘한동안 당신을 만나기 힘들 테니 알아서 건강을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물론, 상대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이런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가장 몰인정한 인사는 후닥닥 도망치듯 던지는 “먼저 가볼게요.” 같은 말이 아닐까.
나라마다 작별 인사는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많은 것은 ‘조만간 다시 보자’는 내용 같다. 중국에서 쓰는 작별의 인사말 ‘再见(짜이찌엔)’, 프랑스에서 쓰는 ‘au revoir’, 영어권에서 쓰는 ‘see you’는 모두 ‘다시 만나자’는 뜻이다. 이보다 안심이 되는 말이 있을까. 오늘이 끝이 아니라 다음에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인사보다 포근한 말이 있을까.
룰루 왕 감독의 영화 <페어웰>은 작별 인사에 대한 이야기다. 뉴욕에 사는 ‘빌리’(아콰피나)는 중국에 살고 있는 친할머니의 폐암 4기 소식을 전해 듣는다. 할머니의 살날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빌리는 당장 할머니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빌리의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진단명을 알려주지 않기로 결정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당연히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박하는 빌리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 그런 말이 있어. 암에 걸리면 죽는데 사람을 죽게 하는 건 암이 아니라 공포라고.”
가족들의 거짓말이 시작된다. 빌리의 사촌 ‘하오하오’는 3개월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을 급조하게 되고, 그 핑계로 온가족이 할머니의 집에 모이게 된다. 할머니는 손자의 결혼식이 기쁘고 오랜만에 함께 모인 가족들이 반갑지만, 아들과 손주들은 표정 관리가 쉽지 않다. 울고 싶은데 웃어야 하는 상황에서 코미디가 만들어진다.
<페어웰>은 ‘죽음’에 대한 무거운 질문을 가벼운 코미디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어떻게 작별을 고해야 하는가. 본인에게 병명을 그대로 알리고 준비할 시간을 줄 것인가, 아니면 병을 숨기고 일상을 살아가게 할 것인가. 할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내가 죽을 날을 알고 준비하는 게 좋은 일일까, 아무것도 모른 채 기쁘게 살아가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게 좋은 일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고, 제각각 답변이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한 빌리는 “환자에게 병명을 알려주지 않는 건, 미국에서는 불법이에요. 그리고 다 같이 속인 걸 알면 (할머니 입장에서는) 화나시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이모 할머니는 “네 할아버지 암 선고 받았을 때 할머니도 똑같이 했어.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 싶을 때 말했지.”라고 중국의 문화를 설명해준다. 할머니가 남편에게 그런 행동을 했으니 자신도 이해할 것이라는 얘기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감독은 이런 설명을 해두었다. ‘실제 거짓말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감독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됐고, 할머니에게 했던 거짓말의 경험으로 이야기를 채운 것이다. 영화 속 가족들의 거짓말이 좋은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슬픈 거짓말인 건 확실하다. 대체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이로운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인데, 영화 속 가족들은 그렇지 않다. 눈물을 흘리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빌리의 삼촌은 이렇게 설명한다.
“빌리, 할머니께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야. 너무 큰 짐이니까. 다 말해버리면 죄책감 안 느껴도 되니까. 나는 말씀드리지 않을 거다. 할머니 대신 그 짐을 지는 게 우리 몫이니까.”
맞는 말일까? 할머니에게 병을 알리지 않는 게 짐을 대신 지는 행동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빌리의 고모는 할머니에게 병을 알리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작별 인사? 그건 너무 슬프잖아. 그런 상황 만들어드리기 싫어. 지금 이모 상태 엄청 좋은데 괜히 얘기하면 좋은 기분 다 망칠 거야.”
할머니에게 병을 알리지 않는 이유는 가족들 모두 슬픔을 회피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슬픔을 피하는 게 좋은 일일까?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냥 기쁘게 웃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게 좋은 일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경쾌하지만 마냥 웃게 되지는 않는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은 슬프지만, 마냥 울게 되지는 않는다. 빌리의 꾸부정한 자세처럼 우리는 웃음과 울음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사람들이다.
내 마음을 가장 뒤흔들었던 장면은 빌리와 할머니가 작별 인사를 할 때였다. 빌리는 할머니를 좋아하고, 할머니도 빌리를 무척 아끼지만, 두 사람은 무척 오랜만에 만났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예측해보자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껴안는다. 빌리는 할머니에게 말한다.
“할머니 보러 또 올게요.”
할머니가 대답한다.
“알지, 알지. 우리 곧 또 보자꾸나. 얼른 가라. 인사는 이제 그만하자.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얼른 가라.”
빌리의 엄마, 그러니까 할머니의 며느리는 이렇게 인사한다.
“몸 잘 돌보세요. 들어가세요, 어머니.”
할머니는 대답한다.
“너희 차 타면 들어갈게.”
빌리의 아빠, 그러니까 할머니의 아들은 이렇게 인사한다.
“들어가세요, 어머니.”
할머니가 대답한다.
“빨리 가, 비행기 놓칠라. 잘 지내라, 내 새끼.”
이어지는 장면은 빌리의 시점이다. 택시의 뒷창문을 통해 할머니를 본다. 할머니는 손을 흔들고 있다. 할머니의 모습은 점점 멀어진다. 할머니는 울음을 터뜨린다. 할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빌리는 뒷창문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어떤 인사도 빌리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없을 게 분명한 사람에게 어떤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을까? 뉴욕으로 돌아온 빌리는 어두운 자신의 방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
빌리와 할머니의 이별 장면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의 마음은 복잡하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서 일을 하고 사랑을 하며 내 생활을 해나가고 싶은 의욕에 차기도 하고, 어머니를, 할머니를 거기에 남겨두고 온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부모님은 고향에 그대로 계신 것인데, 우리는 왜 부모님을 남겨두고 온다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건 아마 사랑의 크기 차이 때문일 것이다. 부모가 내 생각을 하는 것에 비하면, 나는 부모를 자주 떠올리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빌리의 아빠는 “곧 다시 어머니 보러 올 거예요.”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빌리의 엄마는 몸 잘 돌보시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빌리만이 할머니를 다시 보러 올 것이라고 인사한다. 할머니에게 거짓말하기 싫어했던 빌리는 결국 가장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인사 역시 일종의 거짓말일지 모른다. “조만간 봐요.” “밥 한 번 먹어요.” “연락할게요.” 같은 말들. 때로는 그런 거짓말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 잘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 “할머니 보러 또 올게요.”라고 했던 빌리의 마지막 거짓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