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운전을 해야 할 때면 며칠 전부터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곤 했다. 자동차에 시디 플레이어가 있었을 때엔 14곡 정도를 담은 시디를 여러 장 만들어두었고,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생기고 나서는 ‘드라이빙 뮤직’이라는 재생목록에 음악을 골라 담았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과속을 유발하면 곤란했고, 템포가 느려서 졸음을 부르는 곡도 제외했다. 시내 주행을 할 때는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었는데 장거리 운전 때는 그러지 않았다. 비틀즈의 노래들이나 ‘더 킨크스(The Kinks)’ 같은 1960년대의 록큰롤, 1980년대의 뉴웨이브 음악 등이 자주 선곡됐다. 그러고보니 대부분 중고등학교 시절 자주 들었던 음악이다.
그 중에도 비틀즈의 ‘Drive My Car’만 나오면 운전 에너지가 상승하곤 했다. 비틀즈의 노래 중에서 운전할 때 듣기에 이만큼 좋은 곡은 없다. 폴 매카트니의 거침없는 목소리로 시작해서 기타, 베이스, 건반의 밸런스가 완벽하게 유지되면서, 록큰롤의 흥겨움을 끝까지 간직하고 있다. 게다가 ‘내 자동차를 운전해달라’는 가사에다 자동차의 경적 소리를 흉내낸 ‘beep-beep, beep-beep, yeah’ 같은 따라 하기 좋은 후렴구까지 있으니 뭘 더 바라겠나.
대리 운전 문화가 발달한 한국에서는 이상한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운전하길 즐기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이상한 말이 없다. ‘내 차를 운전해달라’니, 그건 사적인 영역으로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방을 공개하는 것과 비슷하다. 내 차가 처음 생겼을 때 나만의 방이 생긴 기분이었다.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들을 수 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차를 몰고 어디론가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카 푸어(Car Poor ; 고가의 차를 산 후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내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집을 사기 힘드니까 좋은 차로 집의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Drive My Car’가 품은 기묘한 뉘앙스를 이용해 소설을 썼다.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젖어있는 중년 배우 가후쿠와 그의 운전사로 고용된 미사키가 주인공이다. 가후쿠는 녹내장 때문에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운전사를 고용한 것이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는 조수석에 몸을 묻고 스쳐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항상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았던 그에게는 그 시점에서 바라보는 거리 풍경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주 가끔 대리 운전을 맡겼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 내 차에는 좌석이 여러 개 있지만 내가 앉는 곳은 운전석뿐이다. 다른 자리에 앉을 일은 거의 없다. 누군가 내 차를 운전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대리 운전을 맡겼을 때는 술을 마신 상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더욱 낯설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단편소설 한 편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드라이브 마이 카>, <세에라자드>, <기노> 등 세 편의 설정을 이리저리 엮어서 만든 것이다. 누군가 내 차를 운전하게 된다는 설정만큼은 영화에서도 무척 중요하다.
연극 배우이자 연출가이기도 한 가후쿠는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참여하게 되면서 체류 기간 동안 자신의 자동차를 운전해줄 운전사를 소개받는다. 운전하는 동안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대본으로 연습을 하는 습관이 있는 가후쿠는 난처하다.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이었고, 자신만의 연습실이었던 자동차에 새로운 사람을 들여야 한다. 연극제 운영위원회는 운전사를 반드시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몇 해 전 연극제에 참석했던 사람이 자동차 인명 사고를 내는 바람에 강제적인 조항이 생긴 것이다. 가후쿠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소개 받은 운전사 미사키는 놀라울 정도로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미사키는 열네 살부터 운전을 시작했다) 뒷좌석에서 잠든 엄마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운전하던 버릇 때문에 매순간 부드럽다. 주변을 살피는 신중함이 뛰어나며 집중력도 좋고, 서두르거나 흥분하는 법도 없다. 하루 정도 잠을 자지 않아도 끄떡 없을 정도로 장거리 운전에 능숙하며, 말도 없이 정면을 응시할 뿐이다. 가후쿠는 미사키의 운전에 대해 극찬했다.
“가속도 감속도 아주 부드러워 중력이 느껴지지 않아요. 차 안이란 걸 잊을 때도 있어요. 다양한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탔지만 이렇게 편한 건 처음이에요.”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던 가후쿠와 운전에만 집중하던 미사키는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두 사람이 서로를 믿게 된 결정적 이유는 15년 동안 고장 한 번 나지 않은 빨간색 자동차 ‘사브(SAAB)900터보’다. 미사키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자동차를 소중하게 타는 사람이라면 믿어도 된다’는 생각을 했고, 가후쿠 역시 ‘이렇게 내 자동차를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믿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연극을 며칠 앞둔 상황에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가후쿠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이틀이라는 시간 안에 마음을 정해야 한다. 가후쿠는 운전사 미사키에게 묻는다.
“당신 고향이 홋카이도라고 했는데, 거길 나한테 보여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없지만 보여줄 순 있어요.”
긴 여행이 시작된다.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구글 맵을 열어 검색해보니 자동차로 꼬박 스물여덟 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가후쿠는 장거리 여행을 제안한 게 미안했는지 교대로 운전을 하자고 청하지만 미사키는 단호하게 ‘운전은 나의 일’이라고 선을 긋는다.
가후코가 미사키의 운전을 믿지 못했을 때, 가후코는 운전석의 대각선 뒷자리에 앉았다. 운전 실력에 감탄한 후로 가후코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았다.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이다.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로 향하는 길에서 가후코는 미사키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긴 여행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됐다.
두 사람은 각각 아픈 과거가 있다. 가후코는 아내에 대한, 미사키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1,882킬로미터를 달리는 장면을 감독은 꿈처럼 찍는다. 끝내 도착하지 못할 것처럼 풍경을 천천히 흘려 찍는다. 미사코의 고향집에 도착했을 때에야 두 사람은, 거리가 주는 위안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밤을 새서 꼬박 달려와야만 알 수 있는, 현실인 듯 꿈결인 듯 온몸이 피로로 가득 찬 상태에서만 알 수 있는 진실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비행기로 한두 시간만에 날아왔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882킬로미터를 달려오면서 주고받았을 이야기, 긴 침묵, 함께 보았을 수많은 풍경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언덕 위로 올라오려는 미사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 가후코가 손을 내민다. 미사키는 흙 묻은 손이 ‘더럽다’며 피하려 하지만 가후코는 손을 잡아준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또 다른 작품 <아사코>의 마지막 장면은 남녀의 대화였다. 남자가 불어난 강물을 보면서 “더러운 강이군.”이라며 비웃듯 말한다. 여자는 대답한다. “그래도, 아름다워.” 우리의 삶은 때론 처절하고 더럽고 비열하고 안쓰럽고 가엾고 지저분하여 불어난 강물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흘러가고 있다는 것, 어디론가 끝까지 가보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당신은 누군가의 더러운 손을 기꺼이 잡아줄 수 있는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