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5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이혜영 씨의 수상소감이 화제였다. 솔직하고 감동적이며 유머러스한 소감이었다. 수상소감의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이어서 전문을 적어두고 싶다. 만약 수상소감을 말할 기회가 있는 사람은 이 내용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홍상수 감독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심사위원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제가 후보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수상소감을 생각했었는데요. 너무 많은 버전이 머리에 떠올라서 아직도 정리를 못했어요. 근데 핵심은 이거였던 거 같아요. 제가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게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후회되고, 그냥 조용히 일어나서 극장 문을 나섰던 적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근데 이 <당신얼굴 앞에서>는 제가 부끄럽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꼭 받고 싶었어요. 이런 기회가 저한테 그렇게 많을 것 같지 않아서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엔 두심이 언니(고두심 배우) 때문에 안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 나의 운명아’ 이러고 있었거든요. 근데 저를 불러주셨어요. 정말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 이거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후보로 지명되자마자 수상소감을 생각했다는 말은 솔직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내가 상을 받는다면’, ‘내가 사람들 앞에 서서 소감을 말해야 한다면’이라는 상상을 곧바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잠깐 이혜영 배우의 뇌 속으로 들어갔다 올 수 있었다.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했고, 그래서 꼭 상을 받고 싶었다는 말은, 한 예술가가 자신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본 듯하다. 예술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연극이든 창작되는 순간부터 낡아간다. 예술가는 자신의 지난 작품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 부끄러움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꿈꾸며 앞으로 나아간다.
감동 이후에는 짤막한 유머도 포함되어 있다. 상을 꼭 받고 싶은데 선배 연기자 고두심이 후보에 있는 걸 보고 절망했다는 말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료 연기자에 대한 존경심 가득한 표현이기도 하다. 함께 후보가 되어 영광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마지막 한 마디도 인상적이다. 이혜영 배우는 트로피를 높이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이거 잘 쓸게요.” 어디에 쓴다는 말일까? 잘 보이는 곳에 트로피를 놓아두고,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마음속 칼을 벼릴 수 있는 도구로 쓴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수상소감을 듣고 나니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답게 짧고 간결한 이야기였다. 외국에서 살다 온 상옥(이혜영)은 한국에 있는 동생 정옥(조윤희) 집에 잠깐 머물고 있다. 자신을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다는 감독 재원(권해효)과의 만남을 위해 서울로 간 주인공은 어릴 때 살던 이태원의 집에 잠깐 들렀다가 인사동의 오래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야기의 전부다. 줄거리라고 할 게 없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답게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이야기 사이사이를 가득 채우는 대화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소다.
홍상수 감독 영화의 대사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기묘한 느낌을 줄 때가 많다. 평범한 대화처럼 보이지만 단어 선택이 의외일 때가 많고, 물 흐르는 듯 부드럽지만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목도 많다. 상옥과 동생 정옥이 커피숍에 앉아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다 보면 두 사람의 지난 수십 년이 낯선 경험으로 다가온다.
상옥 : 그걸 했었어. 그 뭐지, 리쿼 스토어. 술 파는 가게. 지금은 내놓았어.
정옥 : 그래? 술 가게를 했어? 그랬구나.
상옥 : 술을 판 게 아니고……, 술집이 아니야. 술병을 낱개로 파는 거 있잖아. 소매상. 시애틀로 이사하고 나서 좀 편하게 돈 버는 게 없나, 하고 찾다가 한 게 그거야. 단골 손님 생기면 편한 일이거든. 난 참 단골이 많았지.
정옥 : 그래? 아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네. 우리 너무 창피하다. 우리 너무 창피한 거 아니야?
동생은 서로 연락을 하지 않은 ‘우리’가 ‘창피’하다고 말한다. 창피하다는 단어가 정확한 표현일까? 창피란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하여 부끄럽다’는 뜻인데 두 자매가 연락하지 않은 일이 남부끄러운 일일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관객은 ‘창피’라는 단어가 놓인 자리 때문에 어색하다가 ‘창피’라는 단어의 뜻을 새삼 생각해보다가 ‘창피한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홍상수 감독은 언제나 일상에서 주고받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흔히 겪는 일을 특별하게 만들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영화란 아마도 스크린 속에 우리의 삶을 비추는 예술일 것이다. 스크린 속의 영화는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주 많이 닮았지만 좌우가 조금 바뀐, 투명해 보이지만 먼지가 조금 묻어 있는 우리의 삶이 영화에 담겨 있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상옥이 잠깐 머물고 있는 동생의 아파트, 상옥이 어릴 때 살았던 이태원 집, 영화 감독 재원과 술을 마시는 인사동 술집이 주요 장소로 등장한다. 동생은 상옥에게 외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한다. 상옥은 그럴 생각이 없다. 아파트를 마련할 돈도 없다. 상옥에게 아파트가 막막한 미래라면, 어릴 때 살던 이태원의 집은 풍성한 과거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어릴 때 놀던 마당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 상옥은 “신기해요. 여기서 있었던 기억이 다 나요.”라며 놀란다. 과거는 아름답게 머물러 있고, 미래는 너무 멀어서 쫓아가기 힘들다. 상옥은 현재에 집중하기로 한다. 영화 초반부에 상옥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기도한다.
“내 얼굴 앞 모든 것이 은총이고 내일은 없습니다. 과거도 없고, 내일도 없고, 다만 지금 이 순간이 천국입니다.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상옥은 영화 감독 재원과 술을 먹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영화를 볼 사람을 위해 어떤 비밀인지는 비밀!)과 어릴 때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열일곱 살 때 서울역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얼굴이 지저분하고 기름때가 묻은 아저씨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얼굴을 핥아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그때, 세상의 실체를 보았다고, 상옥은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눈앞에 이미 다 있어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고, 그냥 다 완성돼 있어요.”
우리의 눈은 때때로 멀리 있는 것을 잘 보려고 눈앞의 것을 놓치는 원시(遠視)처럼 작동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한다. 멀리 있는 것을 잡으려고 눈앞의 것을 보지 못한다. 누구나 상옥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야 상옥처럼 눈앞의 현재를 잘 즐길 수 있을까?
<당신얼굴 앞에서>에 나온 대사를 듣다가 힌트를 얻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한참 지났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오랫동안 주고받은 다음에 갑자기 상옥이 이렇게 말을 꺼낸다.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반갑다고.”
재원이 대답한다.
“예.”
한 것 같지만 하지 않은 말들, 중요한 말인데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말을, 잊지 말라고 해주는 말 같다. ‘반가워’, ‘고마워’, ‘좋아해’, ‘미안해’ 같은 말들. 그 말을 잊지 않고 하는 것이 현재를 잘 즐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