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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애프터 양

by 김중혁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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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춤추는 장면을 좋아한다.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장면도 좋고, 부드럽고 우아한 춤 장면도 좋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영화적인 순간’이 거기 들어 있기 때문이다. 몸은 주체할 수 없이 움직이고,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아름다우며, 감정은 넘쳐흐르고. 장면과 장면의 연결은 꿈에서 본 것처럼 황홀하다. 춤은 이 모든 것을 압축해서 관객에게 전달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몇 편의 춤 영화들.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춤 시퀀스는 볼 때마다 울컥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 포기하고 만 꿈들의 또 다른 미래가 평행우주처럼 펼쳐지는 장면이다.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에서 그레타 거윅이 추는 춤은 자신만의 예술을 완성하고 싶은 사람의 꿈 같다. <여인의 향기>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슬레이드(알 파치노)가 처음 만나는 여인 도나와 추는 탱고는 인생에 대한 은유다. 춤을 추다 실수할 게 두렵다는 도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탱고는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는 달리 단순하죠. 실수를 하면 스텝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 <더티 댄싱>의 춤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춤이 얼마나 섹시할 수 있는지 알았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영화 <시카고>의 춤 장면을 돌려 본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티렉스’와 ‘더 잼’의 음악을 배경으로 추는 빌리의 울분 가득한 춤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 중 하나다. 춤 장면을 다시 보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영화 속 인물의 감정으로 빨려들어간다.


최근 보았던 가장 멋진 춤 장면은 애플티비플러스의 드라마 <파친코>의 오프닝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과 일본으로 떠난 이민자들의 팍팍한 삶을 다룬 드라마인데 오프닝의 춤 장면은 몹시 밝다. 4대에 걸친 등장인물이 모두 나와서 ‘Let’s Live For Today’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마치 아무런 아픔도 없는 사람들처럼, 한번도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처럼 온몸을 흔들면서 춤을 춘다. 드라마 내내 수많은 고통과 역사의 질곡을 다루면서 ‘오늘을 살자’는 노래와 춤을 전면에 배치했다는 것은 제작자들의 의도를 선명히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다. 1, 2, 3, 7편의 연출을 맡은 코고나다 감독의 입김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코고나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 <콜럼버스>에도 춤이 등장하고 최근작 <애프터 양>에도 중요한 순간에 춤이 등장한다.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속 춤이 특별한 이유는 (<파친코>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와 춤이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콜럼버스>는 어머니 때문에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케이시(헤일리 루 리차드슨)의 답답한 일상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다가 케이시가 폭발한다. 영화 내내 건축에 대해 조용히 말하던 케이시는 사라지고,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조명삼아 숨을 헐떡이며 춤을 추는 케이시가 나타난다. 케이시에게는 음악도 필요 없다. 케이시의 춤은 춤이라기보다 몸부림에 가깝다. 함께 있던 사람이 몸부림에 가까운 춤을 보다가 “대체 뭐하는 거냐?”고 묻자 케이시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대답한다. 케이시에게 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셈이다.


코고나다 감독의 최근작 <애프터 양>에서는 네 가족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 등장한다. 근미래의 어느날, 네트워크를 통해 3만 가족 이상이 참여하는 ‘4인 가족 월례 댄스 대회’가 열린다. 주인공 가족의 조합은 기묘하다. 아빠는 백인, 엄마는 흑인, 중국에서 입양한 아이, 아이가 뿌리와 단절된 채 자라는 걸 원치 않아 문화적 배경을 일깨워줄 목적으로 구입한 중국인 모습의 안드로이드 ‘컬처 테크노’. 댄스 대회에 참가하는 가족은 카메라를 보면서 똑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어야 하고, 가족 중 누군가 실수할 경우 탈락하게 된다. 1단계가 지나고 3천 가족이 탈락한다. 주인공 가족은 잘 버티고 있다. 균형 잡기, 비행하기, 전투하기, 히치하이크, 지진, 토네이도 등의 미션을 통과하면 2단계 완료. 9천 가족이 탈락했다. 주인공 가족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주인공 가족은 3단계에서 안타깝게 탈락했지만 가족은 춤을 통해 행복해 보인다. 영화 초반부터 유쾌한 댄스 대회를 보고 나니, 무척 밝은 영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속았다. 영화를 보면서 더이상 웃을 일은 없다. 댄스 대회 직후 안드로이드 ‘양’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모두 춤을 멈췄는데, 양 혼자만 춤을 추고 있다. 고장이 난 것이다. 다음날이 되자 아예 전원이 켜지지 않는다. 오빠라고 부르던 양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미카’는 식음을 전폐하고 양이 회복되기를 기다린다. 부모는 난감하다. 딸에게 안드로이드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에게는 죽음이 상수지만, 안드로이드에게는 변수다. 세 명의 인간 가족이 죽기 전까지 안드로이드 ‘양’이 살아 있을 줄 알았지만 갑작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존재가 등장한다. 세 가족은 인간이지만, 안드로이드를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옆집에는 복제인간이 살고 있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개념이 서로 다르다. 인간은 죽음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어하며, 안드로이드는 죽음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복제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들을 혐오한다.
가족들이 댄스 대회에서 추는 춤은 그래서 남다르다. 삶과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든 모두 함께 모여 춤을 춘다. 인간도, 안드로이드도, 복제인간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존재가 하나로 묶인다. 코고나다 감독이 영화의 제목을 ‘애프터 양’이라고 지은 이유는(원작 소설의 제목은 <양과의 작별 인사>다) 삶보다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짧고 죽음은 길다. 춤추는 시간은 짧고 침묵하는 시간은 길다. 양의 전원이 켜지지 않는 바람에 불현듯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출입문에서 상대방에게 ‘애프터 유(After You)’라고 양보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양을 따라서 죽음으로 진입해야 할 존재들이다. 양이 떠나고 난 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양의 몸 속에는 특별한 메모리뱅크가 숨겨져 있었다. 하루에 3초 분량의 동영상을 저장해둔 것이다. 아마도 양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순간을 저장해두었을 것이다. 양이 저장해둔 영상을 보면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시리얼에 우유를 붓는 장면, 비가 내리는 풍경, 무지개, 단란한 가족이 영상에 담겼다. 거창한 작품이 아니고 3초 분량의 짤막한 영상일 뿐이다. 남은 가족들은 영상을 보면서 추억에 빠진다. 현재의 짧은 순간들이 모여 거대한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누구나 양을 떠나 보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애프터 양’을 미리 걱정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기록하고 느끼는 것이다. 최대한 많은 풍경을 바라보고 최대한 많이 맛보고 즐겨야 한다. 그리고 춤이란 아마도 ‘지금 여기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를 보여주는 최고의 몸부림일 것이다. 오늘을 위해 살고, 오늘을 위해 춤을 추자.

 

 
애프터 양
함께 살던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추자 제이크 가족은 그를 수리할 방법을 찾는다. 그러던 중, ‘양’에게서 특별한 메모리 뱅크를 발견하고 그의 기억을 탐험하기 시작하는데…무엇을 남기고 싶었어, 양?
평점
7.3 (2022.06.01 개봉)
감독
코고나다
출연
콜린 파렐, 조디 터너-스미스, 저스틴 민, 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 헤일리 루 리차드슨, 새리타 커드허리, 클립튼 콜린스 주니어, 브렛 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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