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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계단/영화 리뷰

메이의 새빨간 비밀

by 김중혁 202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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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태초의 인간은 팔이 넷, 다리가 넷, 머리 하나에 얼굴이 둘이었다고. 앞뒤를 다 볼 수 있고, 팔과 다리가 넷이나 되니 도구를 쓰기도 수월했을 것이다. 인간은 완벽한 상태에서 행복했다. 신들의 걱정이 시작됐다. 너무나 완벽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숭배하지 않을까, 인간이 인간을 숭배하지 않을까. 걱정쟁이 신들은 인간을 반으로 쪼갰다. 둘로 나뉘어진 인간은 영혼의 반쪽을 찾아서 비참하게 떠돌게 됐다는 이야기. 영혼의 반쪽을 만나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사랑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내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나뉘어진 반쪽이 멀리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우리 몸 속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아주 가끔 마음으로 밀려오는 완벽한 충만감도, 뭔가 꽉 차는 듯한 희열을 느끼는 이유도 우리 안에 들어 있던 반쪽을 만났기 때문은 아닐까. 사방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뭐든지 다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 때 숨어 있던 반쪽을 만난 것은 아닐까. 완전한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든 게 아닐까. 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 속담도 있는 모양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어릴 때는 <두 얼굴의 사나이>에 열광했다. 마블 영화 덕분에 이제는 전세계인이 알고 있는 그 이름, ‘헐크’다. 평범해 보이던 사람이 열받으면 근육질의 괴물이 된다는 설정 때문에, 몸이 커지면서 상의는 모두 찢어지지만 바지만큼은 절대 찢어지지 않는 기괴한 모습 때문에 친구들과 헐크 이야기를 자주 했다. 우리는 모두 헐크처럼 되고 싶어했다. 친구들은 대부분 비실비실했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헐크의 힘으로 싹 다 바꿀 수 있길 바랐다. 찢어진 바지만 걸치고 있는 모습은 몹시 부끄러울 것 같지만, 그래도 헐크가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서 만난 ‘어벤져스’의 헐크 역시 매력적이었다. 헐크가 되기 전의 존재인 브루스 배너 박사는 점잖고 지적이다. 사색을 즐기는 내향적인 존재다. 헐크는 완전 반대다. 난폭하며 시니컬하고 장난기로 가득하다. 평소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을 헐크는 간단하게 폭발시킨다. 우리 안에는 브루스 배너도 있고 헐크도 있다. 내 안의 다른 존재가 깨어나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정반대의 변신도 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 첫 문장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철갑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들어 보니 아치 형의 각질 부분들로 나누어진,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다.” (<변신> 프란츠 카프카, 홍성광 옮김, 열린책들)


헐크가 되고 싶다는 욕망 못지않게 어느날 내가 흉측한 벌레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역시 우리 내면에 들어 있다. 오늘은 인간이지만 자고 일어나면 내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자고 있는 사이 나만 모르게 세상이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 안에 들어 있다.


픽사의 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헐크’와 ‘카프카’를 섞어놓은 것 같은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캐나다의 토론토에 살고 있는 13살 모범생 ‘메이’가 어느 날 아침 거대한 너구리 판다(Lesser Panda)로 변하면서 겪게 되는 성장 이야기다. 하필이면 레서판다로 변하게 되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메이의 선조 중 ‘선 이’라는 분이 레서판다를 너무나 좋아하여 레서판다로 변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 능력이 모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메이의 엄마도 할머니도 몸 속에 레서판다가 들어 있다. 선 이는 레서판다를 좋아했으니 그렇다쳐도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후손들이 레서판다로 변신하는 걸 좋아할 리 없다. 붉은 달이 뜨는 밤, 봉인하는 의식을 치르면 레서판다를 숨길 수 있다.


영화는 13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감독 ‘도미 시’는 “영화 속 모든 것을 13살 메이의 눈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며 “13살 여자 아이가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이고 엄마에게는 사랑스러운 딸이고, 동네 어른들에게는 ‘좋은 아이’지만, 메이 역시 또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돌 그룹 ‘포타운’을 좋아하고,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13살이 넘으면 ‘성인’으로 인정하여 버스 카드에도 ‘성인’으로 표시하는데, 메이는 그 표시가 무척 자랑스럽다.


엄마와 세대 차이를 가장 크게 느끼는 지점이 바로 ‘음악’이다. 엄마는 포타운이 못마땅하다. 입고 다니는 옷도, 음악의 스타일도, 심지어 공연의 티켓 가격도 못마땅하다.


“200불이라고? 자기들이 무슨 셀린 디온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엄마의 기준에서 200불의 가치를 지닌 사람은 셀린 디온뿐이다. 메이는 친구들과 포타운의 공연을 보러 가기 위해 직접 돈을 벌 계획을 짠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레서판다를 대하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태도다. 메이가 레서판다로 변하자 부모는 고칠 수 있는 ‘병’으로 생각한다. 메이 자신은 거대하고 붉은 레서판다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반면 친구들은 덩치가 크지만 지붕 위를 뛰어다닐 수 있는 레서판다를 귀여워하고 ‘짱멋지다’고 생각한다. 메이는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다. 레서판다를 봉인시키면 부모들은 안심하겠지만 메이는 다시 평범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레서판다 봉인식과 포타운의 공연을 같은 날로 설정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메이는 어떤 선택을 할까? 엄마를 만족시키는 게 유일한 삶의 목표였던 메이는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성격을 표현할 때 ‘둥글다’, ‘모났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는 사람을 둥글둥글한 성격의 소유자라 하고, 어딘지 모르게 삐딱하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모났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마냥 둥글둥글해질 필요는 없다. 우리가 바닷가의 돌멩이도 아닌데 둥글둥글해져서 뭘 하겠나.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이 떠오른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단점이 없는 사람은 장점도 거의 없다.”


누군가의 장점과 단점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단점은 상대에 따라 장점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모서리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이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은 칼로 사람을 죽이고, 어떤 사람은 칼로 음식을 만들어 사람을 살리는 데 쓰듯 누군가의 모서리는 상처를 줄 때도 있지만,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사람이 붙들고 올라서는 모서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부끄러워했던 순간이 성장을 위해 꼭 필요했던 시간임을 훗날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끔찍하게 싫어하던 것을 무지하게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엄마는 메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남은 배려하지만 자신에겐 엄격하지. 내가 그렇게 가르쳤다면 정말 미안하다. 이젠 참지 마. 네가 더 멀리 날아갈수록 엄만 더 자랑스러울 거야.”


기성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목적지를 정해주고 길을 차근차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을 사랑하고 과정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메이의 새빨간 비밀
디즈니와 픽사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흥분하면 거대한 너구리 판다로 변하는 13살 소녀 ‘메이’의 이야기.
평점
5.5 (2022.01.01 개봉)
감독
도미 시
출연
로잘리 치앙, 산드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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