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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컴온 컴온' 속의 책 1. 마이크 밀스 감독의 영화에는 책이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비기너스’에서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의 20세기’에는 수잔 손택을 좋아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컴온 컴온’의 조니는 조카에게 책을 읽어준다. 2. ‘컴온 컴온’의 주인공, 조니의 직업은 라디오 저널리스트.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청소년들을 인터뷰하는 게 주업무다. 조니의 작업을 지켜보다보면 인터뷰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데, 커스틴 존슨의 책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기도 한다. 책 제목은 ‘카메라맨이 할 수 있는 일의 불완전한 목록’. 인터뷰는 평소 꺼내지 않는 말들을 하게 해주고 자신을 대상으로 깊이 들여다볼 기회를 준다. 인터뷰는 자신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게 해주고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말끔히 .. 2022. 10. 13.
경계선 1943년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인종 폭동은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폭동 사건일 것이다. 자동차 생산이 호황이던 1940년대, 30만 명이 넘는 백인 노동자와 5만 명이 넘는 흑인 노동자가 디트로이트로 밀려들었다. 백인 거주자들은 흑인들이 지역과 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고, 강력한 분리를 원했다. 한 자동차 회사에서는 백인들과 같은 생산 라인에서 일할 수 있게 흑인 노동자 3명을 승진시켰다가 2만 명이 넘는 백인 노동자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곪아가던 상처가 터진 것은 1943년 6월. 백인과 흑인들이 맞붙으면서 34명이 죽고, 43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0명이 체포되었고, 200만 달러 상당의 재산이 파괴되었다. 에서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디트로이트 폭동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2022. 10. 12.
리틀 포레스트 해마다 봄이 오면 신비로운 색의 변화에 탄성을 멈출 수 없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어두운 회색빛 속에서 연두의 기운이 드러날 때면 나도 모르게 특정 색깔을 응원하게 된다. “연두, 힘내라!” 소리 내어 응원하지 않아도 연두는 힘이 세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쑥쑥 솟아나 있고, 며칠 바쁘게 지내다 문득 살펴보면 나무며 땅이며 먼산에는 온통 연두 천지다. 연두는 서서히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봄은 순식간에 번지고 계절은 빨리 바뀐다. 올봄에는 꽃이 한꺼번에 피었다. 전문가들은 기후 변화 탓이라고 한다. 원래 겨울과 봄 사이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었다. 완전한 겨울 - 혹한의 기운이 조금 사라진 겨울 - 봄의 기운이 살짝 드러나는 겨울 - 봄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 듯한 추위가 느껴지는 겨울 - 마못해 .. 2022. 10. 11.
인사이드 아웃 최근에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신작 은 사후세계를 다루고 있다. 재즈 뮤지션을 꿈꾸던 주인공 조 가드너는 밴드 오디션에 합격한 후 너무 기뻐서 뉴욕 거리를 뛰어다니다가 그만 맨홀 아래로 빠져버린다. 눈을 떠보니 사후세계. 이름도 무시무시한 ‘머나먼 저세상(Great Beyond)’이다. 깜짝 놀란 조 가드너는 무작정 도망을 가다가 이번에는 ‘머나먼 전 세상(Great Before)’에 도착한다. 태어나기 전의 영혼들이 자신의 성격을 형성해줄 ‘불꽃’을 찾는 곳이다. 조 가드너는 22번 영혼의 불꽃을 찾기 위해 함께 모험을 떠난다. 황당한 스토리 같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을 잘 살려, 설득력 있게 사후세계와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가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런 곳이 있을.. 2022. 10. 10.
미나리 수렵 채집 시기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하루 평균 네 시간만 일했다고 한다. 휴일 없이 일한다고 쳐도 주 28시간 근무다. 일을 마치고 와서는 동굴에서 멍 때리고 있거나 벽화 같은 걸 그렸겠지.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사냥을 하거나 먹을 걸 구하러 나갔을 것이다. 음식 창고가 가득 차거나 날씨가 궂으면 일을 건너 뛰기도 했을 것이다. 24시간 편의점이 없다는 건 좀 불편해 보이지만,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삶은 좀 부럽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적인 삶을 꿈꾸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에게도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겼던 시기가 딱 한 번 있었다. 군입대 전에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며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외갓집에 ‘자진 농활’(내 의지로 뛰어 든 농사 활동)을 간 적이 있다. 일손이.. 2022. 10. 9.
브로커 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를 보았다. 영화 '어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뜻밖의 이유로 모인 '이상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차이가 있다면 그 가족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두 명의 경찰이 있다는 점. 미행자 관찰자 시점이라고 해야 할까. 두 경찰의 존재는 영화 속에서 이질적이다. 미행하는 듯하다가 사건에 깊이 개입하고, 주인공에게 설교를 하는가 하면 사건 뒷수습까지 한다. 이상한 관찰자 시점이다. 2. 익숙한 설정과 전에 한 번쯤 본 듯한 인물들이 많다. 보육원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청년, 아이를 버리는 엄마, 철 없이 해맑은 어린아이, 가족으로부터 배제된 중년의 남자. 익숙한 인물들이 펼치는 로드 무비인데, 예상처럼 이야기가 흘러가지는 않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치고는 해피엔딩 쪽이.. 2022. 10. 7.
작은 빛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집 앞 평상에 앉아서 구구단을 외우던 모습이다. 그때 우리집은 여자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분식집을 하고 있었는데, 가게 바로 앞에는 이웃 사람들이 잠깐 쉬어 갈 수 있도록 널찍한 평상이 놓여 있었다. 구구단을 다 외우면 잡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만화 잡지)를 사주겠다는 어머니의 꼬임에 빠져, 평상에 앉은 나는 불필요한 선행 학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끝내 나는 구구단을 다 외웠고, “우리 아들 천재네!”라는 칭찬도 들었으며(입학하자마자 아닌 것으로 밝혀짐), 곧장 를 선물 받아 열심히 탐독하였다. 위 문단은 몇 퍼센트나 사실일까? 나는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고,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것.. 2022. 10. 6.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몇 년 전 메리엄웹스터 영어 사전에 ‘stan’이라는 단어가 새로 추가됐다. ‘광적인 팬’ 혹은 ‘특정 유명 인사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행위 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미국 래퍼 ‘에미넴’이 2000년에 발표한 ‘Stan’이라는 노래에서 비롯된 단어다. 가사 속에서 스탠(Stan)은 에미넴에게 집착하는 광적인 팬의 이름이다. 시대를 반영한 노래가 새로운 단어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He stans hard for BTS.”라고 동사로 쓰면 “그는 방탄소년단의 광팬이다.”라는 뜻이 된다. 이런 사례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Mitty’다. ‘Mitt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몽상가, 자기를 대단한 영웅으로 꿈꾸는 소심자.”라는 뜻이 나온다. 1939년, 소설가 제임스 서버가 잡지 를 통해 발표한 소설 의 .. 2022. 10. 5.
어디갔어, 버나뎃 예술에 대한 멋진 문장을 모아두던 때가 있었다. “넌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누군가 물으면, “음, 유명한 예술가 누구누구는 이렇게 말했죠, 예술이란 말이죠…….” 이런 식으로 거장들의 대답을 인용하고 싶었다. 멋있어 보이고 싶었는데, 아무도 예술이 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20년 넘게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다보니, 예술에 대한 나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같은 말들. 어렸을 때는 이 말을 비웃었다. ‘인생, 겁나게 긴데, 무슨…….’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예술도 겁나게 짧은데, 무슨…….’으로 바뀌었다. 인생은 짧은 게 맞고 예술도 짧은 게 맞다. 광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예술이 길어봐야 얼마나 길까. 노래도, 그림도..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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